제목 | 16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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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15 | 조회수32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제1독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주해 예루살렘 신도들의 생활 46절 46-47ㄱ절에서는 성찬을 묘사한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성찬을 행했다. 교회 건물이 따로 없었고 교우들 가정에 돌아가며 성찬을 행했다. 그러니까 교회는 원래 대형 건물이나 집단이 아니라 가정에 모인 신앙공동체였다. 가정교회 모습이 1고힌 16.18; 필레 1.2; 로마 16.5; 골로 4.15에 잘 드러난다. 신도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여” 성전의 제사와 기도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성전에서 사도들이 가르침을 듣기도 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주해 3절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아버지”라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된다”.“새로 나게 하셨습니다”는 세례의 효과를 말한다, “생생한 희망”은 “상속”과 “구원”에 대하 희망이다. 하느님이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그 부활은 바로 우리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4절 옛 이스라엘의 상속은 가나안 땅을 의미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상속”은 종말의 “생명의 은총”,“축복”,“구원”이다.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은 그 상속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6절 6-9절에서는 신도들이 체험하는 어려움과 보람을 말한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원하십시오”를 “그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슬픔이 아니라 신도들이 불의한 일을 당하면서 느끼게 되는 습픔을 말한다. 버림받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슬픔이다. 7절 “찬양과 영광과 영예”는 문맥상 신자가 받을 것으로 해석되지만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8절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하는 ” 것을 매우 아쉽게 느꼈던 모양이다. 필자는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쁨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 기쁨으로 즐거워하십시오”를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주해 19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한 것과 연결하려는 저자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른 아침” 대신 “저녁”이라고 함으로써 아침에 발견한 빈무덤사건의 최고봉을 시사한다. 아무튼 부활사건과 부활체험을 같은 날, 곧 “주간 첫날”의 일로 서술한 것은 틀림없다, 이어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 시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한다. 예루살렘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는 역사적 보도라기보다 예수의 부활발현사화를 보도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제자들의 공표와 불안을 시사하는 데 역점이 있다. 저자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상태에서부터 행방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부활한 예수의 새로운 실존방식과 그 현존에 오히려 더 관련된 표현이다. 부활한 예수는 돌무덤을 열고 나오듯이 굳게 닫힌 문을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이제 예수는 닫힌 세상을 열린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막힌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갈 것이다. 예수의 적극적 주도권이 시사된다. 부활발현은 완전히 예수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유다인들의 평상시 인사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별담화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평화”를 이제 부활한 예수가 기원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 즉,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사말이다. 20절 부활한 예수가 바로 십자가상에 처형된 예수의 동일인임을 뜻한다. 그러기에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부뢀한 예수를 제자들이 실제로 많았음을 시사한다. 루카복음에는 “옆구리”대신 “발들”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요한복음은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상기시키려는 듯하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 실제로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이제 기쁨, 곧 부활의 기쁨으로 바뀐다. 따라서 “주님을 뵙다”란 말은 이별 때 예수가 약속한 말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제자들이 가지게 된 기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1절 이 평화인사는 19ㄴ절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성령”과 함께 주어지는 내적이고 영적인 선물이다. 인사나 축복보다 차원 깊은 의미로 그러나는 평화의 산물이다. 이 평화는 부활한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제자들에게 주는 선물로써 제자들의 사명 수행과 함께하고 세상에 증언하는 참된 평화다. 따라서 부활한 예수로부터 받을 수 있고 또한 참으로 원하고 적극적으로 바라는 평화다. 제자들 파견이 아들 파견에 참여한다는 의미보다는 파견된 실존의 권위에 더욱 중점이 있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그리스도론적 파견사상이 시사된다. 22절 이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의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한다. 부활한 예수는 공동체 삶을 가능케 하는 성령, 곧 자신의 성령을 제자들에게 준다. 즉,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로부터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된다. 이제 제자들은 믿는 자 모두가 받게 되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예수의 약속도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 성령은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자 모두가 세례를 통해 세례를 받고 또한 죄의 용서와 함께 새로 태어난다고 여겼다. 저자도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메시아로 소개했다.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또한 죄를 용서할 권한도 위임받았다. 23절 부활한 예수가 사죄권을 제자들에게 준 방법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죄의 용서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이 용서는 부활한 예수가 공동체에 준 선물인 동시에 위임이다. 현 문맥에서 “제자들”은 신앙공동체를 대표한다. 죄의 용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 요한 교회도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여겼다. 부활한 예수는 자기 죽음의 결실을 제자들의 권한으로 부여한다. 그 결실은 구원을 항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사죄는 구원의 원천인 예수의 보편적 원천이 폐쇄된 채 머문다는 것을 뜻한다. 24절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은 제자 열두 제자 가운데도 있었음을 우선 말하기 위한 일종의 상황묘사다. 25절 문맥상 토마를 제외한 이른바 “열두 제자”를 가리킨다. 이 “열둘”은 실제 숫자보다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단”을 가리키는 듯하다. “열두 제자”가 토마에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열두 제자”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여기서 토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예수 부활에 관한 증언을 듣는데 토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소개된 셈이다. 사도시대에도 예수 부활신앙에 대한 의심은 있었다. 26절 토마는 믿음이나 신뢰를 위한 증거를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의심 또는 불신을 드러낸다. 토마의 이런 태도는 표징이나 기적을 부지 않고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저자의 관심이 여기에 반영된 듯하다. 또한 그 구절에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부활한 예수의 첫 발현상황과 흡사하다. 여기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서”란 말이 없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의 기쁨이 그 두려움을 이겨났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문들이 잠겨 있었다”란 표현은 첫 발현사화에서도 볼 수 있는 상황묘사이지만, 여기서는 그 역할이 다르다. 의심을 품은 토마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다. 27절 토마는 자기가 요구한 그대로 하도록 부활한 예수로부터 지시를 받음으로써 오히려 당황하게 된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가 언제라도 실제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도 시사한다. 믿음을 촉구한 일종의 경고로서 자기 자신이 요구한 증거가 없는 한 결코 믿지 않겠다는 토마의 말에 상응한 표현이다. 문맥상 토마에게 한 예수의 이 말은 토마의 신앙고백에 대한 직접 동기 또는 근원이 되고,또한 조걱적 믿음에 대한 토마 자신의 말과 조건없는 믿음에 대한 예수의 말을 연결짓는다. 따라서 부활신앙이 반드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가지게 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28절 토마는 자기가 요구한 증거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은 체 오로지 부활한 예수의 말만을 듣고서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이 고백은 우선 개인적 결단으로 이루어진 특성을 지니고 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토마 자신의 개인 고백이다. 토마도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이제 믿게 된다. 또한 부뢀한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되었음도 함께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입증한 셈이다. 즉, 예수는 부활로써 “주님”이요, “하느님”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토마에게 계시한 것이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의 맥락 안에서 예수에 대한 다양한 고백의 절정에 이르고, 또한 저자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을 명료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29절 토마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면서도 눈으로 봄으로써만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한 질책도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보다”란 말은 토마가 부활한 예수로부터 체험한 일체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30절 여기서는 좀더 광범한 의미로 사용된 개념이다. 우선 믿음을 가지도록 “제자들 앞에서” 행한 예수의 지상활동을 표현한다. 이 언급은 세상에서 행한 예수의 표징들, 이른바 표징의 책 결말 부분과 비교될 수 있다. 전자는 “표징”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참된 믿음을 지켜주는 긍정적 관점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불신의 맥락에서 업급된 부정적 관점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불신의 맥락에서 언급된 부정적 관점이다. 현 문맥에서 “표징”은 제자들 앞에서 이루어진 부활한 예수의 발현사화의 관계를 배제할 수 없다. 원래의 표징 개념과는 달리 예수릐 자기계시에 대한 차원 깊은 의미의 질적 특성을 강조하여 부활한 예수의 놀라운 일도 함께 표현한다. 즉 예수의 놀라운 일도 함께 표현한다. 즉, 예수의 지상적 활동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또한 믿음을 위한 “표징”의 적극적 관점으로 언급한다. 제자들을 “표징들”의 증인들로 강조한다.. 31절 이미 믿음을 가진 요한 교회를 가리키는 듯하다. 공동체의 믿음을 더욱 일깨우자는 것이 저자의 근본 관심사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존칭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유다인들의 비난을 겨낭하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더욱 힘차게 고취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존칭도 유다인들의 메시아 대망을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으로 강조하는 신앙고백이다.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도록 바라는 저자의 의도가 내포된 표현이다. 예수와의 결속관계에서 얻는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가리킨다. 바로 이 구원이 그리스도인 실존의 요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저자의 이 신학사상은 그리스도론의 구원론을 연결짓고 복음서가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시사한다. 즉, 저자의 그리스도론적이고 구원론적 관심사가 표명된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동기나 목적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바로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일깨우며 강화하고 심화하는 데 있는 것으로 명시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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