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20) 바벨탑과 세상나라 (창세1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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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17 | 조회수21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20) 2023. 4. 17. 월 바벨탑과 세상나라 (창세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후에 인류를 또 두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한 부류는 하느님께 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자녀 중에서 셈과 야벳의 자손들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함의 자손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이렇게 노아의 자손 중에서 하느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과 저주를 받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된 이유는 덮어줌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노아가 실수한 것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설하듯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노아를 통해서 함과 그의 자손들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0장 6절부터 20절까지를 보면 함의 자손들이 나옵니다. 창세기10장9절에 보면 함의 자손가운데 니므롯이 나옵니다. (창세10,9) 9 그는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니므롯처럼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이라는 말이 생겼다. 여기서 주님(야훼) 앞에서란 “야훼를 대항하는, 대적하는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실수를 공개하고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함의 자손가운데, 하느님을 대적하고 하느님을 대항하는 자손들이 나왔습니다. 또 함의 자손가운데서 바벨론이 나오고, 아시리아가 나옵니다. 또 블레셋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했던 족속들입니다. 또 함의 자손가운데서 가나안족속들이 나옵니다. 이 가나안 족속들도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했던 족속들입니다. 또 창세기10장 9절에 함의 자손가운데서 니므롯과 같이 싸움을 잘하는 용감한 사냥꾼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용감한 이라는 말이 포악한 이라는 말입니다. 또 사냥꾼이라고 했는데, 사람을 죽이는 사냥꾼이 나왔습니다. 또 창세기10장 12절에 함의 자손들이 “니네베와 큰 성읍 켈라 사이에 레센을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함의 자손들이 큰 성읍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보면 성공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성공이 절대 하느님 보시기에 성공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함의 자손들이 세상적으로 큰 용사가 나오고, 큰 성읍을 이루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손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저주를 받는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가 실수한 것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덮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셈의 자손들 가운데 아브라함이 나왔고 이사악과 이스라엘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왔습니다. 또 야벳은 오늘로 말하면 유럽인들입니다. 유럽인들은 인구는 작지만 인류의 역사를 보면 번창(繁昌)하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셈은 자신의 아버지 노아가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오직 하느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지 아니하시고, 공개하여 드러내보자 라고 하셨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셈과 야벳처럼 우리들의 실수와 허물들을 서로 덮어줌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땅을 차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4절에 보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창세11,4)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여기서 성읍(城邑)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히브리원문으로 보면 “나라”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베탑을 쌓는 사람들은 지금 나라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지금 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이루려고 하는 나라는 바로 세상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세상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①첫째-모든 일의 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철저히 인간이 중심이 되는 나라입니다. (창세11,3)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성과 대를 높이 쌓자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나라를 건설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나라는 모든 일의 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철저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②두 번째, 말씀을 거역하는 나라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바벨탑을 지으면서 그들이 하는 말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짓자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1절과 7절에 하느님께서 노아홍수 이후에 사람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땅에 번성하라. 또 땅에 가득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땅에 ‘모이지 말고 흩어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쌓는 사람이 땅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짓자고 합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을 정반대로 거역하는 말입니다. 즉 이 바벨탑에서 보여준 세상나라는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을 반대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나라입니다. 또 ②세 번째, 인간의 이름은 높이고 나타내는 나라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그들이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목적은 바벨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온 땅에 나타내고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나라는 무슨 일이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 인간의 이름을 높이 나타내려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이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벽돌 한 장 한 장에 자신들의 이름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뒤에 셈의 족보가 나오고 셈의 자손가운데 아브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창세기12장부터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셈의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나라와 대조되는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보통 나라라고 할 때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권(主權)입니다(왕이신 하느님). 둘째는 백성(百姓)입니다(하느님백성). 셋째는 영토(領土)입니다(가나안 땅). (창세17,7)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느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리라는 말씀은 “내가 너와 네 후손의 주권자 즉 왕이 되어줄게”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주권자인 왕이 되어주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리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느님나라의 주권자인 왕이 되어주시고, 그 자손들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나라를 통치할 왕이 있습니다. 왕은 하느님이십니다. 또 백성이 있습니다.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라를 이룰 영토가 필요합니다. (창세12,1)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이유가 가나안 땅은 하느님이 왕 되시는 하느님나라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것은 원래 하느님께서 태초(太初)에 에덴동산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善惡果)를 두신 이유는 에덴동산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왕이신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하느님나라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우리로 하느님나라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진정한 우리의 왕이신 나라,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는 비록 이 세상나라 속에 살지만 우리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세상나라의 원리를 따라 지배받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의 원리를 따라서 지배를 받는 삶이란 것을 잘 기억합시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중에서 이 땅에서 누가 제일 잘 살았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야곱이 제일 잘 살았고, 그 다음이 아브라함이고, 그 다음이 이사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입니다. 이사악 아브라함 야곱 순입니다. 이사악이 육신적으로 제일 잘 살았습니다. (창세26,12-13) 12 “이사악은 그 땅에 씨를 뿌려, 그해에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듯 복을 내리시어, 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 앞에서 내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중에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곱이 제일 잘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세상나라의 사람이었다면, 야곱이 제일 잘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나라는 야곱과 같이 남을 속여서라도 높이 되고, 많이 가지고 차지하려고 하면 잘 살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그리고 우리는 이제 단순히 이 세상나라의 원리에 지배받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나라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도 절대 잘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느님나라의 백성답게 하느님나라의 원리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원리대로, 하느님나라의 백성답게 살면, 하느님께서 이 땅에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하느님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세상의 것들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백성으로, 세상나라가 아니라 하느님나라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느님나라는 이 세상나라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18,36).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나라사람들과는 반대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철저히 반대되고 대조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나라사람들과는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상나라와 반대가 되고 대조가 되는 하느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①첫째,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하셨던 하느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일의 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인간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40살 때의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교육도 철저히 잘 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40살 때의 모세는 신앙의 용기도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40살이 되었을 때 자신의 동족이 애굽 사람에게 학대를 받는 것을 보면서 의분(義憤)이 일어나 그 애굽 사람을 죽일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모세의 행동이 왕자로서의 세상적 영광을 버리고 그리스도같이 고난 받는 길을 택한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40살 때의 모세는 세상학문과 신앙교육으로도 최고이고, 거기다가 믿음의 결단과 용기까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는 40살 때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40년 동안 광야의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의 결과 모세는 하느님 앞에서 4번식이나 “나는 말을 못하여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애굽의 왕자교육의 첫번쩨 과목은 수사학(修辭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40살까지 제일 잘 할 수 있었던 것이 말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말을 잘 못한다고 하는 말은 그가 인간적으로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조차도 이제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이 다 갖추어진 40살 때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80 살 때의 모세를 사용해서 하느님나라의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세상나라의 논리로 본다면 당연히 40살 때의 모세가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할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나라의 논리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정반대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절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했을 때 하느님은 철저히 우리를 꺾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속해있는 하느님나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를 죽이는 말씀이 아니라 너무나 힘을 주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부족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연약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실패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나라에서는 부족하면 되지 않습니다. 연약하면 되지 않습니다. 강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한 체라도 해야 합니다. 실패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면 할수록 하느님은 우리와 더 함께 해주십니다. 나의 연역함을 깨닫고 하느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했을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강한 사람보다 더 큰 힘을 주시고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연약한자를 도우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인간은 절대 절망입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아직 내가 믿고 있는 나의 힘이 다 떨어져야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나의 힘줄이 끊어져야 하느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이제 내 나이가 80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지팡이를 의지하면서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팡이를 의지할 수밖에 없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셨듯이 나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②둘째, 우리가 속해 있는 하느님나라는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나라와는 반대로 철저히 말씀중심의 나라입니다. 또 그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가 우리가 속해있는 하느님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세상나라는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나라입니다. 바벨탑과 같이 철저히 하느님말씀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나라가 바로 이 세상나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문화는 그 이면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과는 대조가 되고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문화들입니다. ‘넷플릭스에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제일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그 드라마에 대해서 논평을 보았습니다. 그 드라마의 주제는 더 이상 하느님이 인간 세계에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인간세계에 대한 심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온전히 심판하실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더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만이 완전하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 이 세상의 문제가 하느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옥과 같은 세상입니다. 이와 같이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나라는 철저히 하느님말씀에 거역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 있는 하느님나라는 철저히 하느님말씀에 순종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세상나라의 원리로 본다면 하느님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게 보입니다. 말씀대로 살다가 어떻게 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의 백성인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平安)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말씀중심이 되지 않고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하느님의 말씀에 가장 잘 순종 한 사람이 이사악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러 갈 때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예비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악 자신이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이사악이 아버지 이럴 수 있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이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 전에 제단 위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이사악은 하느님의 말씀이면 죽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40살이 되었을 때 결혼하지 않았어도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레베카를 데리고 올 때도 그는 누가 올 것인가?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레베카가 저 먼 발치에서 올 때도 이사악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베카가 왔을 때도 그녀가 외모가 어떤가 얼마나 예쁠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아브라함의 종이 “하느님이 당신의 종을 인도하셔서 레베카를 데리고 왔다는 말만 듣고,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는 일부다처(一夫多妻)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악만이 오직 레베카만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사악은 물질에 큰 욕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 때문에 싸웁니다. 그러나 그냥 그 우물을 줍니다. 또 우물을 팠습니다. 또 싸웁니다. 그러니 또 줍니다. 나중에 또 땅을 파니 우물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정말 하느님께서 이사악과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고 이사악과 화친을 맺습니다. 이러한 이사악의 삶은 세상나라로 본다면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사악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기에 하느님께서 순종하는 그와 함께 하심으로 이 땅에서도 100배의 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35장에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베텔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세겜과 수콧에서 머물러 땅을 사고 집짓는 일에만 열중합니다. 그때 세겜에서 딸 디나가 겁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이는 사건이 나옵니다. 야곱은 오직 가지고 차지하는 일에만 집중했지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 야곱은 이 땅의 삶도 험악하고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호세4,16) 16 고집 센 암소처럼 정녕 이스라엘은 고집이 세다. 그러니 주님이 어찌 그들을 어린 양처럼 넓은 곳에 놓아 기를 수 있겠느냐?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은 야곱처럼 하느님께 불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같이 완강하다”고 합니다. 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소를 끌고 저 넒은 푸른 풀밭으로 데리고 가서 더 풍성하게 먹이려 하십니다. 그런데 이 소는 완강합니다. 끌려가려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버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완강한 암소 같은 이스라엘을 어린 양같이 넓은 들에서 먹임같이 먹이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완강한 암소가 아니라 순한 어린 양이 되어야합니다. 순한 어린 양같이 하느님중심으로, 성경말씀 중심으로 순종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더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③세째로 하느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달리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나라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벽돌 한 장 한 장 마다 자신의 이름을 세겨 넣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나라는 온통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고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중심이 되고 말씀중심이 되면 당연히 그 결론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위대한 하느님의 종들이 말년에 육신적인 질병으로 고통하며 죽었습니까. 그것은 아무리 위대한 하느님의 종이라도 절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사람에게 영광이가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오직 하느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며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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