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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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4-17 | 조회수37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요한 3,1-8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니코데모는 참으로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사이’면서 유다 최고 의회격인 ‘산헤드린’에 속하는 의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Samhedrin)은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 율법의 복잡한 내용을 해석하는 등 종교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그 주된 기능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행정권과 사법권은 물론 율법에 따른 형사권도 행사하는 등 유다 정치 체제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요. 그처럼 막강한 권력을 쥐고 이스라엘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대체로 예수라는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거나 아예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그분의 활동에도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그 니코데모가 어느 날 밤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으신 분’이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그분과 함께 하시기에 그 능력에 힘 입어 그런 놀라운 표징들을 일으키시는 거’라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그의 신앙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세상에 어둠이 깔려 인적이 드문 시간, 그래서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때인 ‘밤’을 택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지요. 그의 마음이 ‘진리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는 있지만, 혹시나 자신이 그분을 따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잃게될까 두려워,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직 영적인 밤에, 죄악의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그였습니다. 허나 몸은 세상에 두고 눈으로만 주님을 쫓아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이 지금 누리는 삶의 모습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은 굳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서까지 ‘새로 태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괜히 뭔가를 바꿔보려고 시도하다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게될까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지요. 그렇기에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그 무엇도 내려놓지 않으면서,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살짝 첨가해 자기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줄 일종의 ‘추가재료’이자 ‘양념’ 정도로 신앙을 바라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부자 청년이 그랬고, 어쩌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니코데모도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따라 완전히 뒤집어 엎는 ‘새로운 탄생’을 요구하십니다. 하늘 ‘위’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들을 제 힘과 능력으로 얻어냈다는, 그러니 제 마음과 뜻대로 하겠다는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태도로 살았다면,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사랑과 인내를 깨달은 다음에는 ‘믿음’이라는 새로운 지평 안에서 하느님 뜻에 온전히 순명하며 따르는 참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속한 복된 사람이 되어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린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바람이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 바람을 불게 하고 싶으신 데로, 그분의 뜻과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자유입니다. 영에서 태어난 사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완전히 새로워진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 뜻과 욕심대로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되지요. 그러니 계명과 의무라는 방식으로, ‘십자가’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구속은 우리를 더 기쁘고 행복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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