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22) 아브라함과 믿음의 삶 (창세12,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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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19 | 조회수58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창세기(22) 2023. 4. 19. 수 아브라함과 믿음의 삶 (창세12,1-9)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오늘 본문 1절을 보기 바랍니다. (창세12,1)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고향과 친척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테라를 설득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가 자녀들을 데리고 가나안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란이란 곳에 머물렀습니다. 가나안 땅은 미지의 땅입니다. 그런데 하란은 테라의 아들 나호르가 먼저 가서 거주하였던 땅입니다. 또 거기서 기반을 딱은 곳입니다. 또 하란은 무역과 상업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안정된 곳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테라는 하란에서 머물렀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은 아브라함에게 안정감을 주고, 신뢰감을 주던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진짜 모든 가족들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결혼시킬 때 내 고향 친척집에서 아내를 맞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네게 가족들이 있지만 그 가족들에게서 안정감과 신뢰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게 안정감을 찾고 신뢰감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또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너의 과거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우상을 숭배하던 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서 너희 조상들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우상을 섬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호24,2)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갈대아우르)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원래는 우상을 섬기던 조상들을 두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성도(聖徒)라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는 우리도 다 우상(偶像)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너희의 과거에서 살던 삶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필리3,13) 13 형제 여러분, 나는 이미 그것을 차지하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과거)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미래)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날마다 과거와 이별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과거는 기억은 해야 합니다. 좋은 기억은 추억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나쁜 기억은 교훈을 삼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를 가지고 살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과거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실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기 바랍니다. (창세12,1)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과거)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미래)으로 가거라. 여기서 보면 과거를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여 줄’ 이란 미완료형으로 미래에 보여줄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 가나안에서 그가 죽을 땅만 차지했습니다(창세49,31). 이 가나안 땅은 수 백 년이 지난 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실 땅이었습니다. (창세12,2)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이것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주실 약속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당대에 큰 민족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도 미래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하여 이루어주셨습니다. (창세12,3)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 안에서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이 약속들은 현재에 이루어질 말씀들이 아니라 모두 미래에 이루어질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미래에 이루어 주실 약속들을 현재에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살았습니다. (창세12,4)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미래에 이루실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요한8,56)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미래에 그의 몸에서 태어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구원의 복을 받게 될 것을 믿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미래에 주실 것을 현재에 이미 가진 것처럼 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입니다. 하박국서에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악인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 (하바2,2-3) 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환시(묵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3 지금 이 환시(악인의 심판)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응(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다나라에서 악을 행하는 자를 바벨론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것은 하박국이 야훼 하느님의 일을 한 뒤인 26년 후였습니다(하박국BC612☞유다멸망BC586). 또 그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도 73년 뒤였습니다(BC539). (하바2,4) 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악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하박국이 말하는 믿음도 악인의 심판이 앞으로 몇 십 년 뒤에 이루어질 사실이지만 그것이 마치 현재 이루어진 것처럼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하박국은 현재 악인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하느님께서 악인들을 물리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바2,14) 14 “물이 바다를 뒤덮듯 땅은 주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야훼를 인정하는 의인(義人)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은 몇 천 년 뒤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야훼하느님을 인정하는 의인들이 장차 미래에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미래에 의인으로 가득 찰 세상이 현재에 이미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주실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르11,24)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눈에 보이게 있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현재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미리 기뻐하는 것입니다. 한나도 기도할 때 슬퍼하며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1사무2,17-18). 요즘 많은 분들이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말년에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욥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욥의 곤경을 180도 돌이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욥의 말년에 갑절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말년이 욥의 말년처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미래를 보여줄 내비게이션은 성경(聖經)입니다. 우리는 인생 내비게이션인 성경을 보면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말씀만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면 반드시 우리에게 복된 미래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잘 되는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첫째, 미래에 꿈만 보고 현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이 걸어가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미래에 주실 복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에 받은 것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는 앞으로 미래에 하느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실 복을 믿음으로 가나안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창세12,5)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가나안땅을 주실 것을 믿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땅에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왜 마침내 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가는 것이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800km). 또 가나안땅으로 가는 길에 좋은 땅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땅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고 마침내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3,9)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너는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고 말씀 하십니다. 너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의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같이 받기 위해서 우리도 복 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22장에서 아브라함은 외아들(獨子) 이사악을 바치라 했을 때 바쳤습니다. (창세22,12.16-18)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6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어르신들이 자녀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지’ 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실 복을 믿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 받을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순종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경외(敬畏)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가장 무겁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을 두렵게 여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 하시든지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복을 나도 받을 줄 믿습니까? 그러면 날마다 매순간 마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하느님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미래에 주실 복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갑시다. 2)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이란 예배하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어가는 가나안 땅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창세12,6)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가나안 땅은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땅입니다. 아브라함을 환영하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초지(草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들어가면 이미 거주하였던 가나안 사람들과 다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삶이란 현실 가운데 믿었던 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걸어가지만 현실을 바라보면 순간적으로 실망할 수 있습니다. (창세12,7)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현실가운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실망하였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 예배(禮拜)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내게 약속을 이루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하느님 지금은 가나안 땅에 내 소유의 땅이 없지만 저는 하느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느님 한분만으로 기뻐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박국도 하느님을 믿었지만 현실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바3,17-18) 17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는 딸 것이 없고 밭은 먹을 것을 내지 못할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어떤 사람이 아이에게 묻습니다. “아이야 너는 왜 아빠를 좋아하지 너 아빠가 네가 좋은 것을 주기 때문에 좋아하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말합니다. “아니예요 난 아빠가 내 아빠라서 좋아요”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하느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아빠이신 것만으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그래서 내게 아무 것이 없어도 하느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3)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이란 끊임없는 고난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창세12,8)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아브라함은 세겜을 지나서 베텔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곳은 산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넓은 초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서 처음 천막을 친 곳이 왜 산입니까? 그 이유는 가나안주민들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 위에 올라가서 천막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산위에서도 야훼께 제단을 쌓고 야훼 이름을 부릅니다. 그 이유는 산으로 쫓겨서 올라온 아브라함에게는 야훼하느님만이 그의 의지(依支)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야훼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세12,8)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남방) 쪽으로 옮겨 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점점’ 이라고 하는 것도 아브라함이 천막을 치면 또 쫓겨나고 천막을 치면 또 쫓겨나서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서 하느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끊임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로마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5장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하느님으로 더불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5장 3절부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5,3-4)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미래를 보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만 바라보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브라함처럼 끊임없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또 인내는 수양(修養), 단련(鍛鍊)을 낳습니다. 단련은 희망을 이루어줍니다. 이 희망은 장차 우리가 영원한 하느님나라에서 가게 되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잘 되게 하시리라는 희망입니다. (로마5,5)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미래에 잘 되게 해 주시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절대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서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서 미래의 희망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닙니다. 말씀을 통하여 미래에 희망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성성령으로 끊임없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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