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장애인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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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19 | 조회수29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해마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사기를 진작하려고 우리나라가 기념일로 정한 ‘장애인의 날’이다. 한국 천주교회도 2000년부터 해마다 이날을 장애인의 날로 지내며, 장애인들의 복지와 인권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제1독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주해 28절 4,18 참조: “사도들을 불러들인 다음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했다.” 마태 27.25 참조: “그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감당할 것입니다.” 29절 베드로의 답변은 다른 선교설교들에서처럼 서론, 선포문, 회개 촉구, 증인들인 사도들 순으로 짜여져 있다. 30절 “나무에 달아”는 신명(LXX)21.22-23의 영향을 받은 표현으로서 사도 10.39: 갈라 3.13에도 나온다. 31절 루카는 새로 태어나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구원자”라고 한다. 33절 성령이 증인이라니 무슨 뜻일까?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증언하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깨달음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는 뜻이다. 성령이 증언한다는 말이 1요한 5,6-8에 나온다. “...영이 증언하는 분이시니, 사실 영은 진리이십니다. 증언자는 셋이 있으니, 곧 영과 물과 피이며, 이 셋은 일치합니다.” 복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주해 계시자이신 예수 이 대목은 13-21절과 함께 예수의 자기계시에 관한 저자의 복음선포적 해설로 여겨진다. 즉,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가 던진 질문에 연결된 저자의 복음선포 내용으로 본다. 예수의 계시 말씀이 저자의 복음선포적 증언형식으로 보도된다. 31절 “위에서 오시는 분”은 “하늘에서 오시는 분”과 함께 예수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천상적 계시자요 증언.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유일무이한 “아들”과 맥락이 같다. “모든 이”는 “땅의 것”에 얽매여 인간적 한계와 약점에 놓인 지상 인간 모두를 가리킨다. 즉, “땅”과 “위”가 구별되듯이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난 이”도 대립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립적 존재 상황보다 천상과 지상의 엄청난 거리가 시사되며 천상과의 관계 속에서 지상이 상대화한다. 32절 예수의 증언, 곧 계시 말씀이 천상적인 것임을. 즉, 자기를 파견한 하느님의 것임을 언급한다. 예수의 계시는 “하늘”에서 직접 유래하므로 그 자체로 참된 증언임도 시사된다. 따라서 이 증언은 “진리”로서도 표현된다. 33절 천상적 참된 증언, 즉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의 증언인데도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저자의 슬픈 체험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계시된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느님의 진리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한다. 증언된 진리와 구원 약속의 확실성은 하느님의 진실성에 속하고,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느님께 영광을 들리며 하느님의 말씀 자체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인정하고 그 약속대로 결실을 맺음을 뜻한다. 34절 하느님의 예수 파견은 구약 예언자들과 달리 예수 자신이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한다는 뜻에서 새롭고 유일무이한 파견이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예수의 말씀을 들음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다. 하느님이 파견된 자에게 어떠한 제한도 없이 “땅”을 충만히 주신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풍요로움 속에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으로써 당신이 파견하신 예수의 말들을 성령이 충만한 신적 말씀들로 만드신다. 따라서 예수의 증언이나 계시는 더없이 완전하고 결정적이다. 문법적으로 볼 때,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 자신이 믿는 자들에게 “측량하지 않고서 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두 번역 모두 문맥상, 내용상 가능하고 모순되지도 않는다. 35절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밀접한 결속관계로 언급되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강조된다. 즉, “측량하지 않고서”선물로 주어진 사랑이며,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겨주는” 사랑이다. “손에 맡긴다”는 권한을 넘긴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계시할 권한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 “모든 것”은 계시할 모든 진리를 가리킨다. 36절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 곧 “아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믿음은 계시자의 구원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그 계시자를 실제로 따르는 것까지도 뜻한다. 즉, 믿음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계시자와 인격적 결속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라는 명사 대신 “믿는다”란 동사만 사용된 것도 바로 그런 뜻을 시사한다.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삶이 직접 가능하고 구원이 현재적이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란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생명을 보지 못한다”란 “하느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다”와 같은 뜻으로 하느님의 생명 영역, 곧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의미다. “하느님의 징조”는 일반적으로 종말론적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심판의 의미로 사용된다.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 아래 머무는 자라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오늘 장애인의 날을 맞이하여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두가 장애인인지도 모릅니다. 사회에서 생활하는데 첨예하게 대립하는 생각들과 이겨야 한다는 것들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심각히 서로 대립하여 아픈 사람들이 많은 지도 모릅니다. 거기다가 남북이라는 것으로 갈려진 우리 민족은 서로 하나가되어야 한다는데는 그래도 많은 이들이 동감합니다만 이상은 하나됨인데
어찌할 수 없는 그 하나되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판가름할수 조차 없는 것 아닌가합니다. 어떨때는 우울하고 어떨때는 부수고 싶은 것들도 인하여 특이한 범죄들이 생겨나고 참아내지 못하여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간과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장애인의 날이라는 단 하루만이라도 평화스럽게 지내고 국가도 집단 치료를 꾸준히 병행하여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들 단 하루만이라도 싸움을 멈추고 나로 인하여 국가가 병드는 일은 없어야 겠습니다. 부디 모두를 서로서로 배려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좋은 날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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