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0.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오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믿음의 재발견”). 곧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차원인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성실함’(믿음이나 성실함은 다 같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쓴다)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의미로 ‘순전한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철저한 헌신을 토대로 하는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cro;심장, 생명’+dare;주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며,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 됩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오늘도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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