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2 부활 제2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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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21 | 조회수44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주해 1절 사도행전에서 “제자(들)”란 낱말이 스물여덟 번 나오는데,9.25(바오로의 제자들)와 19.1(제자들=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제외하면 늘 그리스도인(들) 가리킨다. 복음서에서는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한 그분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명사 “봉사”와 동사 “봉사하다”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특히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자선을 뜻한다.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궁한 사람이 없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 중 하나라는 사실을 루카는 앞에서 강조한 바 있다. “매일의 배급 봉사”는 일용할 양식을 제공했다는 뜻이며, “식탁에 봉사하다” 역시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뜻이다. 곧, 식량 배급을 가리킨다. 3절 유다인들은 지역 책임자들을 일곱 명 뽑는 관례가 있었다. 6.3에서는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 일곱에게 식탁 봉사를 맡긴 것처럼 말하지만, 스테파노와 필립보의 활동상을 보면, 그들은 오히려 “말씀의 봉사”에 곧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일곱 대표자 선발사화에 “매일 배급 봉사”,“식탁에 봉사하다”라는 낱말이 나온 까닭에 흔히 그들 일곱을 봉사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단 한 번도 그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바오로계 교회에 나오는 봉사자들과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 서간에 나오는 봉사자 일곱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완전히 다르다. “일곱”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대표자들이고, “봉사자들”은 감독들과 원로들과 더불어 지역 교회 책임자들인데, 감독들과 원로들보다는 한 단계 아래였다고 생각된다. 4절 1.14-3.1에서도 사도들의 “기도”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말씀의 봉사”는 대내적 설교와 대외적 설교를 뜻한다. 5절 일곱 명은 모두 그리스식 이름을 지니고 있다. 스테파노에 관한 정보는 6-8장에만 있다. 그는 일곱 대표자의 으뜸이었고 그리스도인들로서는 맨 처음 순교했다. 그래서 그를 “수선치명자”라고 한다. 순교한 장소는 알수 없지만, 예루살렘 북문인 다마스커스 문 밖이라는 전승이 전해온다. 필립보는 일곱 지도자 가운데서 스테파노 다음으로 돋보이는 인물이다. 스페파노가 순교할 뒤에 그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전도하고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던 길에 가이사리아에 들린 필립보의 집에 여러 날 머무르게 되었는데, 필립보의 딸 넷은 모두 미혼으로서 예언녀들이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베싸이다 출신 필립보는 일곱 중에 하나인 필립보와 다르다. 사도행전의 일곱 봉사자 가운에 나머지 다섯 명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들 중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유다교로 개종한 니콜라오”는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6절 안수로 교회 직분을 부여했다는 말이 6.8;13.3과 사목서간 1디모 4.14; 5.22; 2디모 1.4에 나온다. 7절 7절은 간결한 요약문이다. 세 가지 표현이 있다, “하느님의 말슴이 퍼져나가”: 이와 같거나 비슷한 표현이 12.24; 19.20에 있다. “ 제자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났으며”: 루카는 교회의 성장을 자주 언급한다. “제관들의 많은 무리도 믿음에 복종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예수시대의 제관들은 8,000여 명. 레위인들은 10,000명쯤 되었다고 한다.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주해 16절 해지는 때를 가리킨다. “어두워졌다”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즉, 제자들이 호수로 내려간 시간과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나간 시간이 구별된다, 이 시간적 차이는 예수 홀로 안에 머문 시간과도 관련된다. 18절 상황 설명은 신학적 의도도 있다. 스승 예수가 부재한, 제자들이 스스로에게만 의존한 상황은 혼돈과 죽음의 세력과 폭력이 난무한 위협적 상황임을 시사하다. 이 상황이 제자들의 “두려움”과 함께 예수의 신적 현현, 곧 자기계시의 무대가 된다. 19절 5~6킬러미터 쯤(한 스타이온은 185~200 미터). 하느님이 바다를 장악하여 걸어가시듯 예수도 그런 신적 능력을 갖춘 분으로 묘사된다, 하느님의 인도로 “갈대바다”를 통과한 것도 연상시킨다. 마르 6.49; 마태 14.26 참조. 20절 예수의 신적 자기계시가 구약성서의 하느님 자기계시 표현양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확인시킬 뿐 아니라, 신적 능력을 갖춘 분으로서 계시하며 자신에게 신뢰하도록 요청하면서 위로한다. “나요”란 말은 문맥상 예수 자신이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라고 한 예수의 자기계시와도 연결된다. 형상어 없이 단독적으로 “나요”또는 “내가 그입니다”란 뜻으로 사용된 에고 에이미를 요한복음에서 더러 볼 수 있는데, 뉘앙스의 차이가 있으므로 문맥에 따라 의미를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시오”라는 말도 구약성서에서 환시중에 나타나시는 하느님 이야기에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21절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온 “유령”이 아닌 스승 예수를 알아보고서 두려움을 이겼다는 것을 뜻한다. 배가 “즉시” 닿았다는 말은 호수 가운데쯤 있던 배가 어느새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기적을 뜻하며, 호수에서 일어난 놀랍고 신비스런 사건을 확인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중국무술에 나오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경공이나 땅을 접어서 빠르게 이동하는 축지법은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해도 안되는 것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공부를하고 시행을 하려고 노력들을 하고들 있지만 이러한 기적을 이미 이천년전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그러한 기적을 행하신 분이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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