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간 토요일]그리스도 예수님! 저의 주님이십니다. (요한6,15-21) | |||
---|---|---|---|---|
이전글 | 창세기(25) 전쟁(戰爭) 같은 세상에서 승리(勝利)하는 비결 (창세14,1-24) |1| | |||
다음글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체를 영하는 마음과 잠을 청하는 마음은 같다. |1| | |||
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21 | 조회수38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그리스도 예수님! 저의 주님이십니다.
독서(사도6,1-4)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하느님 말씀의 힘을 받지 못하는 신앙(信仰)은 인간의 힘이 들어가 차별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마태4,4)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복음(요한6,15-21) 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땅의 양식을 하늘의 양식으로, 곧 당신의 생명으로 바꾸어주신 하느님의 뜻, 말씀을 깨닫지(먹지) 못하고 자신들의 배를 부르게 한 빵, 그 육(세상)의 빵으로 먹고 만족 했기에 예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왕으로 모시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가신 것이다. 그 예수님과 분리되었을 때의 상황, 모습을 본문의 제자들을 통해 보여주신다.
1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 왜?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 모든 인간은 고난이 없으면 예수님(뜻, 말씀)을 떠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신명8,2-3 히브12,5-6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 큰 바람이 일 때까지 가지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 들였고,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닿았다. ‘어느새’ - ‘유떼오스“- 즉시. 예수님을 배로 *받아들임이, 배와 제자들임이 배와 제자들이 가려던 목적지(目的地)에 도착하는 일과 동시의 개념(槪念)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제, 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야 한다. 곧 우리 인생의 방향키를 그분께 내 드려야(끌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진정한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마태오, 마르코 복음에 공히 기록되었다. 그러나 관점(觀點)이 조금 다르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육지(陸地)에 계시다가 풍랑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다가 오셔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것으로 기록 되었지만, 요한복음은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는 말은 있지만 제자들이 풍랑으로 두려워했다는 말도 없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셨다는 말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모셔 들이려고 하자 즉시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이 기적의 이야기를 맺고 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의 이야기를 통하여 단순히 풍랑에 밀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풍랑을 꾸짖고 그들을 구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이라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14,33-34)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마르6,51.53)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3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 보다시피,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 어느새’ ‘즉시’ 라는 말이 없다. 이 두 복음에는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고 잠잠케 하신 후에도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곧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즉시) 그들이 가려던 곳에 닿았다.’로 상징적인 표현과 단어들을 동원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生涯)를 가지고 각기 다른 대주제하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차이를 보여준다. 만일 4복음서가 똑같은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같은 주제로 메시지를 전한다면 굳이 복음서가 4권(券)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4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각기 다른 주제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들이기에 네 권으로 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이러한 차이점을 볼 때, 마태오복음은 바다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그림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공포”에 초점을 두고 기록한 것이고, 마르코복음은 그 이야기에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그러한 믿음 없음에 대한 책망을 내리시는 예수님”을 그리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배가 가려 던 곳에 즉시 도착하는 그림을 통해 “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게 된다는 구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병이어(五餠二漁) 표징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 증거가~ (마르6,52)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 분명 제자들이 주님의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해진 이유가 그들이 주님께서 빵을 떼셨던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사건조차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은 두 사건이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도 역시 오병이어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만 말미암는 것“ 이라는 복음 말씀, 그 주제(主題)를 담고 있는 사건이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삶에 풍랑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구원 받은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풍랑은 있다. 이 세상은 풍랑이 이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묵시21,1) 1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풍랑)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풍랑(風浪)이 이는 이 세상에서 풍랑의 바다가 없는 새 하늘을 희망하며 살아야 한다, 살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 말은 우리의 인생의 ‘키’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이다. 곧 주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무를 때 가능(可能)하다.
사도(使徒) 바오로가 감옥에서 쓴 고백(告白)이다.~ (로마1,16)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늘을 희망하는 그 힘으로 살 수 있도록 늘 말씀 안에 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말씀)가 아버지의 뜻(말씀)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