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3주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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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4-23 | 조회수47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부활 제3주일 가해] 루카 24,13-35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어린 시절 두 발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아버지께서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잡아주셨습니다. 그렇게 자전거 타는 일이 점점 익숙해져 자신감이 붙었고 문득 뒤를 돌아보자, 아버지는 더 이상 제 뒤에 계시지 않고 제가 자전거를 잘 타는지 근처에서 지켜보고 계셨지요. 도와주시기 힘드셔서 그러셨을까요?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아버지가 뒤에서 잡아주시면 저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탈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힘으로 달릴 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곁에서 지켜보신 것이지요. 영적인 '홀로서기'의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삶은 누가 내 대신 살아줄 수 있는게 아니듯, 구원은 내 노력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에 영적인 홀로서기가, 주님께서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씩씩하게 걷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제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영적으로 홀로서기를 하게 됩니다. 처음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그리스도가 그 모든 고난을 겪고 난 뒤에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당신 나라를 세우실 때, 그분을 충실히 따른 대가로 새로운 세상에서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을거라 기대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 너무나 무력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자, 자기들이 그분께 걸었던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고, 그로인해 크게 실망하고 낙담한 채로 ‘귀향’하던 중이었지요.
예수님께서 낯선 나그네의 차림을 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당신께서 예루살렘에서 직접 겪으신 그 일들을 몰라서 물으신게 아니지요. 세상의 관점으로만 상황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돌아가셨다는 ‘결과’만 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가신 ‘구원의 과정’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다시 바라보도록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또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믿음 안에서 다시 곱씹어보면서 그 일들에 숨은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될 겁니다.
그 과정에 도움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그냥 ‘글자’로만, 나와는 상관 없는 ‘남의 일’로만 보았을 때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일’로,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미리 준비하신 ‘섭리’로 바라보자 비로소 마음의 눈이 열려 성경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큰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수난과 죽음, 자기들이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땐 ‘실패’와 ‘절망’이라 여겨졌던 그 일들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과정’이었음을,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이미 분명한 계획을 세워두고 계셨고,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그 계획을 알려주셨으며,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감동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되지요. 그렇게 마음이 활짝 열리자 편견과 고집으로 가리워졌던 그들의 시야가 탁 트였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사소하고 평범한 모습에서 그분이 ‘주님’이심을, 자기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계속해서 함께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라며 주님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함께 묵자’고 먼저 청한다는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나쁜 맘을 먹고 도둑이나 강도로 돌변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게다가 둘이서 묵기에도 비좁은 허름한 여관방에 이부자리를 하나 더 깔고, 둘이서 먹기에도 모자란 음식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는다는건 큰 양보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사랑의 기쁨으로 마음이 활짝 열린 그들은 기꺼이 그러고자 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꺼이 실천하였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큰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은 그저 읽기만 한다고 저절로 믿음이 깊어지는게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만 주님을 만나 그분과 깊은 사랑의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진면목을 알아보았으니 이제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를 준비가 되었는데, 바로 그 때 주님께서는 홀연히 사라지시니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구원의 길은 나 스스로 걸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표를 알려주시고, 사랑의 친교를 통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힘과 용기를 주셨으니, 지금부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는 것은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몫인 겁니다. 이를 ‘영적인 홀로서기’라고 하지요. 물론 주님은 우리를 절대 혼자 버려두지 않고 우리 곁에 계십니다. 혹시 그런 주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분께 불평 불만을 늘어놓기 전에 먼저 내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말씀과 뜻을 알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으로 불타오르도록, 그리고 그 열망을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사랑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사 안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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