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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28) 살에 새겨진 사랑의 언약, 할례(割禮) (창세1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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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25 조회수361 추천수2 반대(0) 신고

 

 

창세기(28) 2023. 4. 25.

 

에 새겨진 사랑의 언약, 할례(割禮)

 

(창세17,1-27)

1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2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10 너희가 지켜야 하는 계약, 곧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이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다.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 12 대대로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씨종과, 너의 후손이 아닌 외국인에게서 돈으로 산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13 네 씨종과 돈으로 산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내 계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계약으로 새겨질 것이다. 14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그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야 한다. 그는 내 계약을 깨뜨린 자다.”

15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라이를 더 이상 사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 16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리겠다. 그리고 네가 그에게서 아들을 얻게 해 주겠다. 나는 복을 내려 사라가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여러 나라의 임금들도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18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하고 아뢰자, 19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 나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그와 나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 20 이스마엘을 위한 너의 소원도 들어 주겠다.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리고, 그가 자식을 많이 낳아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그는 열두 족장을 낳고, 나는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21 그러나 나의 이 계약은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이사악과 세우겠다.” 2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

23 아브라함은 그날로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씨종들과 돈으로 산 종들, 곧 아브라함의 집안 사람들 가운데에서 남자들을 모두 데려다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대로 포피를 베어 할례를 베풀었다. 24 아브라함이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아흔아홉 살이었고, 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26 바로 그날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다. 27 그리고 집안의 모든 남자들, 곧 씨종들과 외국인에게서 돈으로 산 종들도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하느님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를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도 그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전혀 사랑할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서 기근이 들자 가나안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가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로 속였던 자입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까? 그 이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하느님보시기에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 밖에 없습니다. 또 실수하고 넘어지는 모습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차지할 가나안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우리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는데 10년이 지나도 이 약속들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세기16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래의 말을 듣고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창세17,1) 1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완전) 이가 되어라.

 

하느님께서 왜 13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도, 그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그냥 내어버려두시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13년이 지난 후 아브라함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피식 웃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스마엘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13년이 지나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오직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13년 동안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가운데 누구의 마음이 더 답답했다고 보십니까? 하느님입니다. 아브라함은 답답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지 않는 하느님이 더 답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답답할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이스마엘이 있기 때문입니다.

13년 동안 만나지 않은 두 연인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또 다른 애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13년을 만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은 속이 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느님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답답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답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너무 사랑하시고,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17,1) 1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완전) 이가 되어라.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라고하느님은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느님이란 엘 샤다이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전능한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너 왜 그렇게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어, 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난 전능한 하느님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나만 믿어라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내 앞이란 내 얼굴 앞이라는 말입니다.

왜 여기서 하느님께서 내 얼굴 앞에서 걸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느님대신에 아내의 말을 듣고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스마엘의 나이가 13살입니다.

이스마엘이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아브라함의 눈은 이스마엘에게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얼굴 앞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얼굴 앞에서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아 제발 내 얼굴 보면 안 되겠니?, 제발 내 얼굴 바라봐. 네가 실수할 수 있어, 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 얼굴 앞에서 행하여 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짝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먼저 하느님을 찾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하느님은 아브라함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전능하신 하느님 얼굴 앞에 살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이때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말씀 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야 너는 내 얼굴을 바라보라, 내 얼굴 앞에서 걸어라, 힘이 들어도 내 얼굴 앞에 있어, 죽고 싶어도 내 얼굴 앞에 있어, 낙심이 되어도 내 얼굴 앞에 있어, 누가 너에게 그 어떤 말을 해도 내 얼굴 앞에 있어, 그리고 아무 걱정 말아라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야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고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17,2) 2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하느님은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둔다는 것은 새로운 약속을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벌써 하느님께서 여러 번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창세기15장에서 자신이 쪼갠 고기가 되어 죽더라도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이 완전히 믿지 못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내가 너와 사라의 몸을 통해서 반드시 자녀가 있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악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계속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로 번성하게 하겠다, 가나안땅을 주겠다고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매사에 잘되며 건강하기를 바라노라사랑하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모든 일(凡事)에 잘 되며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창세17,3)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말씀 앞에 완전히 엎드립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위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성경쓰기를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앞에 완전히 엎드려야합니다.

 

(창세17,4-5)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은 한 가정의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사래는 아름다운 공주라는 뜻에서 모든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에서 사라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지금은 한 가정의 아버지밖에 되지 않지만 내가 이제 너를 모든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도 바꾸어주십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또 종이 아니라 내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15,15)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은 단순히 일만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일만하는 관계가 아니라 교제(交際)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종은 일과 관계된 말만 합니다. 그런데 친구는 비밀스런 이야기도 다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구로 날마다 예수님과 사랑의 통교(通交)를 하며 살아갑니다.

 

(창세17,6)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는 목적이 아브라함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게 하시고 왕들이 나오게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하느님이 왕이 되시는 하느님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임금은 하느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왕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하느님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대리통치자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이 하느님나라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인간 자신이 왕()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가운데 하느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제일 먼저 주권(主權)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백성(百姓)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영토(領土), 땅입니다.

 

(창세17,7)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言約)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세우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세우시는 언약은 내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느님이 되리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왕() 즉 주권자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왕으로서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에서 하느님께서 왕이 되시고 주권자가 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백성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백성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도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많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하느님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후손들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영토 즉 땅입니다.

 

(창세17,8)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약속하신 것은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하느님나라의 백성이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무조건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魔鬼)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에페2,2) 2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한때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사탄),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원래는 마귀의 자녀들이었고 공중권세 잡은 자인 사탄을 따르던 자였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의 하느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구원(救援)의 언약(言約)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탄의 자녀였던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獨生子)를 주심으로 하느님께서 왕 되신 하느님나라의 백성을 삼으신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이 하느님나라의 언약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17,9-11)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10 너희가 지켜야 하는 계약, 곧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이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다.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약의 표시로서 할례(割禮)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 할례는 살에 새겨진 하느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13 네 씨종과 돈으로 산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내 계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계약으로 새겨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동안 아브라함에게 말로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내가 복이 되게 하겠다. 너로 많은 자녀가 있게 하겠다. 가나안땅을 주겠다. 내가 네 하느님이 되겠다 내가 네 삶을 책임져주겠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하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말로만 하니까 아브라함이 잘 믿지 못합니다. 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언약을 우리 살()에 새겨주십니다. 이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는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신체(身體)의 은밀한 부분을 자르는 예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로서 왜 우리의 생명을 상징하는 부분(성기)을 자르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당신의 생명을 잘라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겠다는 표시로 신체의 일부분을 자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신체의 일부분을 자르면서 내가 죽어서라도 내 언약을 지키겠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매일 매일 네 살에 세긴 이 사랑의 언약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할례(割禮)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이 잘려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살다가 도무지 하느님의 사랑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10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습니다. 또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내 삶 가운데서 그 어디를 보더라도 하느님께서 내 하느님이 되신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표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가 구약시대 사람이라면 내 몸()에 새겨진 할례를 생각해야합니다. “아 그렇구나 하느님께서 생명이 잘려서도 반드시 나와 함께한다고 약속하셨다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할례를 통해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하느님의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예리고성을 앞에 두고 모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할례를 행하고 적이 처 들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적이 쳐들어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몸()에 새겨진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살에 새겨진 할례는 생각했는데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신명30,6) 6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과 너희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어,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셔서, 너희를 살게 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할례는 우리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날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살이 잘려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이것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또한 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또 나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우리를 위해서 살이 잘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만 아니라, 이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이 잘려서 죽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레4,4) 4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할례를 하여 자신을 주님께 바쳐라. 너희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어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꽃처럼 터져 나와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리라.”

 

그래서 할례는 신약시대에 세례(洗禮)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세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와 함께 죽었음을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골로2,11-12)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할례(割禮)는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만 생각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짝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두 말굽자석이 함께 울려지는 공명입니다. 손뼉을 칠 때 같은 강도로 칠 때 다른 손의 강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죽이기까지 하느님을 사랑해야합니다.

할례는 우리 몸()에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또한 할례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결단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죽이기까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그 모든 복을 다 받아 누리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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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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