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6 부활 제3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
이전글 |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1| | |||
다음글 | ■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 따뜻한 하루[67] |1|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25 | 조회수42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주해 1ㄴ절 예루살렘 교회의 지속성과 전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사도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여기서 예루살렘 선교 이야기가 종결되고 설교 무대는 마지막 예언대로 “은 유다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땅 끝”으로 옮긴다. 2절 이 구절은 예수의 장례에 관여했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이야기를 반영한다.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당시에 산헤드린 규정에 의하면 돌로 처형된 사람에 대해 애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그 시체는 개인 무덤에 안장될 수 없고 돌로 처형된 사람들을 위한 공동무덤에 묻히거나 화장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스테파노를 장사지낸 경건한 사람들은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일반 유다인들이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했기 때문이다. 3절 “감옥에 넘겨주었다”는 표현은 바오로 자신의 고백에도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에 대한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예언이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5절 필립보는 사도들이 식량 봉사자로 내세운 일곱 사람 가운데 두 번째 인물이었다. 그가 사마리아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은 루카의 설교 구도構圖와 일치한다. 6절 군중은 필립보의 말을 경청한 것뿐이지 아직 그들에게 12절에서 언급된 믿음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7절 구마와 치유를 겸비한 필립보의 선교는 예수 선교의 계승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선교 안에 자리잡은 구마예식은 하느님 나라와 마귀 통치권 사이의 전쟁을 드러낸다. 구마와 더불어 장애자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표지다.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주해 35절 예수 자신이 332-33절에 언급된 “하느님의 빵”이라는 결정적 자기계시다. 즉,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빵”으로서 세상에 신적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이다. 36절 예수의 자기계식 촉구와 구원 약속으로 연결된다. 이런 구조로 된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은 요한복음에 더러 있다. 허기와 갈증의 해소는 구약성서에서 실존적 위기와 불안을 이겨내는 구원을 가리킨다. “오다”와 “믿다”에는 모두 예수를 믿으라는 촉구가 내포되어 있다. 문맥상 이 구절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을 예수 안에서 또한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되리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37절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질책이다. 그러나 예수가 이미 “말했다”는 내용은 문맥상 찾아볼 수 없다. 이미 말한 것을 전제하고서 예수 자신이 그 말을 인용하는식의 표현은 요한복음에 흔하다. 특히 “나를”이 문제점으로 대두된다. 필사본에 따라 있거나 없기 때문이다. 이 인칭대명사가 원본에 있었을 경우, “당신들은 빵의 기적에서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란 뜻이 된다. 나중에 필사자들이 추가했을 경우, 35절에서 거듭 언급된 인칭대명사 “나”를 문맥상 삽입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 이유는 “표징”이란 말을 삽입해 보면 문맥상 순조롭고, “보고도 믿지 않는다”란 26절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질책은 좀더 분명해진다. “당신들은 외적 이유로 나를 찾아옴으로써 비신앙적 모습을 보여주었듯이, 표징들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표징”을 보지 못했다. 예수의 표징들을 외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2절 참조). 하느님에 의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믿음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은총이라는 점도 시사된 셈이다. “아버지께서 주신다”란 표현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란 말과 함께 “영으로부터 난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수는 자기에게 와서 함께 머무는 자들, 곧 자기를 믿는 자들 누구나 쫓아내지 않고 돌본다는 뜻으로, 목자와 양들 비유를 연상시킨다. 예수는 자기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자기를 믿는 자들 누구나 잃지 않도록 돌본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구원계획이 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신학사상이 시사된다. 하느님은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고 아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신 구원의 창시자다. 39절 예수 지상활동의 목적과 의미가 좀더 분명히 언급된다.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37절의 “밖으로 똧아내지 않는다”보다 고조된 적극적 표현이다.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란 40.44.54절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된 내용으로서 예수를 통해 누리는 “생명”이 부활 때 완성됨을 뜻한다. 즉, 종말론적 구원의 현재적 의미가 미래적 의미로 부각된 셈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저자 또는 어느 편집자가 종래의 구원 의미를 삽입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40절 39절은 반복하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관점을 강조한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바라신다는 것이다. “아들을 본다”란 말은 36절을 상기시키면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을 올바르게 알아차리라는 촉구의 의미도 있다. 이면에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는 생각도 내포되어 있다, 이런 눈으로 아들을 보는 가운데 믿음이 실현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란 39절의 “잃어버리지 않는다”의 저극적 표현이고, 동시에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이 이제 그들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설명된 셈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저는 어렸을적부터 편도선 때문에 고생을 무척이나 많이 했습니다. 한번 아프다싶으면 물도 못 마시겠끔 부어올랐습니다. 초등학교때 특히 그랬는데 내가 울면서 아프다고 하면 아버지는 뱀허물을 가루를 내서 대롱으로 목에다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조금은 낫곤 했습니다. 보건소에서 와서 진찰을 하면 만성편도선이라고 했습니다. 동네의 어떤 형님도 그러했는데 수술을 해서 나았다고 했는데 또다시 발병했다고 합니다, 저는 일년에 한번은 이 고통을 겪어야 했는데 군대에서도 꿍꿍 혼자서 앓다가 낫곤 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청 민원실에 근무할 때 열이 너무나 많이 올라가고 아파서 쓰러질 때쯤되자 저는 도저히 병원에 가지 않고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심때가 되기만을 기다리다가 때가 되자 얼른 근처의 병원으로 갔습니다, 솔직히 병원은 10년 이상을 한번도 가지 않고 지내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병원에서 기다리는데 열을 재보던 간호사님이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주사를 큰 것으로 한번 맞고 약을 타기를 기다리는데 약을 짓는 곳은 우리처럼 갇혀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곳에 수녀님 두분이서 약을 짓고있었습니다, 저는 아프기보다 큰 흥미가 났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수녀님이 마치 메뚜기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닥에 종이들이 있고 벽면에는 약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풀밭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주사를 한번 맞고 약을 먹고는 희한하게도 편도선이 살아진 것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껏 한번도 편도선 때문에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오늘따라 그 수녀님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왕이 바람이 난다면 저는 일찌감치 승마교수나 하렵니다. 요즈음 “-- 꽃배달은 싸다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강원도 사람인 나는 “그럼 나는 오른쪽 뺨이나 왼쪽 뺨이냐?”라고 물어보고 싶고 “다른쪽도 싸다구라는 노래를 해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디 노래처럼 그게 쉽겠습니까마는... 주님 이러한 저를 용서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