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 (29) 사라의 웃음 (창세18,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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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26 | 조회수57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29) 23. 4. 26. 수. 사라의 웃음 (창세18,1-15)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야훼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십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18,1)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마므레의 참나무들이 있는 곳은 아브라함이 창세기13장에서 조카 롯을 떠나보낸 후에 야훼하느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창세13,18).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떠나보낸 후에 하느님께서는 네가 밟는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땅 밟지 않고 헤브론 마므레 참나무 숲에 거주하며 야훼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하느님과 친교를 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또 마므레는 뜨겁다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므레 참나무 숲은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뜨겁게 친교(親交)를 나누던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뜨겁게 통교(通交)하는 곳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때는 날이 뜨거울 때라고 합니다. 중동지방에서 이때는 사람이 다닐 때가 아닙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천막 문에 앉아있을 때 하느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창세18,2)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렸다 아브라함이 천막 문에서 앉아 있을 때 눈을 들어보니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하기 때문에 이중에 한 사람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입니다. 또 창세19장1절에 보면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는데,” 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때 이중에 두 사람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천사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브라함이 과연 이들 중에 한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사실과 다른 두 사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히브13,2) 2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不知)중에 천사들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사람인줄 알고 대접하였는데 대접하고 보니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히브리서에서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였다고 하기에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온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이라도 하느님처럼 대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와 같은 사람도 하느님을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하느님에게 하듯이 대(對)하라고 합니다. (골로3,23) 23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바리새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을 나누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섬기기 때문에 육신(肉身)의 부모(父母)는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작은 이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25,35-36.40)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뜨거운 사랑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단순히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작은이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사람도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도 뜨겁게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잘 영접(迎接)하는 사람은 사람도 잘 영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대하듯 해야 합니다. (창세18,2)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렸다. 아브라함이 천막 문에 앉은 것은 더위를 피하기 위하는 것도 있고, 또 할례를 받은 후 상처가 낫기 위해서 앉은 것일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할례는 하느님께서 죽기까지 그를 사랑한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몸에 세긴 하느님의 사랑의 언약입니다. 또한 할례는 아브라함도 생명을 끊기까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천막 문 앞에서 할례를 통해서 그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또 내가 어떻게 하면 나의 생명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생각하고 있다가 문득 사람 셋이 서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천막 문에서 달려 나가 맞으며 몸을 땅에 굽힙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몸을 땅에 “굽혀”라는 말이 “하바”라는 말인데, 이 말은 하느님께 예배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하느님인 줄 알았다면 하느님께 예배하는 자세로 몸을 땅에 굽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만일 바로 하느님인 줄 몰랐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을 하느님을 예배하듯이 그 앞에서 몸을 굽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18,3)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여기서 “나리” 라는 말이 “아도나이”라는 말인데, 이 말도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리” 라는 말이 단수형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세 사람에게 모두 “나리” 라고 한 것입니다. 또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이라는 말은 창세기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주님 내가 주님께 은혜와 사랑을 받았사오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하느님께 은혜와 사랑을 받았사오니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소서” 라고 합니다. (창세18,4)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앞에 3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세 사람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에게 한 말입니다. 그런데 4절은 이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만 아니라 두 사람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이 사람이 천사일 줄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유목민의 풍습가운데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그네에 대하여 발을 씻기고 나무 아래에 쉬라고 합니다. (창세18,5)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의 환대에 대하여 하느님의 일행은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창세18,6)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지금 아브라함이 급히 천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을 하여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여기서 고운 가루 세 스아는 24리터나 됩니다. 세 사람이 먹기에 먹고도 남는 너무나 많은 양입니다. (창세18,7)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은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어 하인으로 급히 요리하게 합니다. 보통 귀한 나그네나 손님을 대접해도 집에서 기른 가축 중에서 양이나 염소를 잡습니다. 그런데 송아지는 그 집에서 가장 귀한 재산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집안에 재산과 같은 가장 귀한 송아지를 잡아서 하인에게 주면서 요리를 하라고 합니다. 또 여기서 ‘달려가’ 라는 말은 가까운 곳에 있는 가축 떼가 아니라 먼 거리에 있는 가축 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가축을 잡으면 하인이 잡는데 아브라함이 직접 잡습니다. (창세18,8)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아브라함은 엉긴 젖, 요즘의 요거트 같은 것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참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 시중을 들었다’ 고 합니다. 앞에서 3절과 4절에서 아브라함이 세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모두 땅에 엎드려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브라함은 이들이 먹는 동안 참나무 아래에 서 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입니다. 또 가솔(종)을 318명 거느리고 있는 큰 집안의 어른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한 낮에 갑자기 온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89세 된 사라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또 99세 된 아브라함이 그 집에서 가장 귀한 가축인 송아지를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직접 송아지를 붙잡습니다. 또 이들이 먹는 동안 나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예배했던 참나무입니다. 그러니 지금 아브라함의 이 모든 행동들은 단순히 사람에게 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향하여 엎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를 지나가지 말라 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향하여 그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가장 귀한 것을 대접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지나칠 정도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은 부르신 것도 하느님의 지나칠 정도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또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로 속인 자신을 지켜주신 것도 하느님의 지나칠 정도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그 몸에 하느님의 사랑의 언약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할례를 통해서 내가 잘려서 죽더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의 가장 귀한 것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어떻게 사람을 하느님처럼 대할 수 있는 그 이유도 주님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가장 귀한 것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사람을 대할 때도 하느님을 대하듯이 합시다. (창세18,9-10)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동안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사라는 그 뒤 천막 문에서 들었습니다. (창세18,11)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하시지만 현실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져 아들을 낳을 수 없습니다. (창세18,12)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지금 사라는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가 아니라 천막 뒤에서 속으로 생각만 했습니다. (창세18,13) 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하느님은 우리 입술의 말도 다 들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금우리의 마음 속 깊은 생각조차, 마음의 신음소리조차도 다 듣고 계시고 알고 계심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라의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18,14) 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돌이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맘때란 말은 “카에트 하야” 라는 말로서 “생명의 때”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은 생명이 소생하는 봄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네 인생에 겨울이 지나가고 인생의 봄날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와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그동안 사라는 아브라함을 따라서 가나안땅에서 24년을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라의 인생은 그동안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13년 전에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하갈에게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13년 동안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만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는 자녀를 통한 즐거움을 보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인생의 봄날은 꿈도 꾸지 못하고 기대도 하지 못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던 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라야 네 인생에도 인생의 봄날이 온다. 1년만 더 있으면 반드시 내가 다시 와서 너로 아들을 있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봄날이 반드시 온다’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삶이 인생의 겨울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이 하나도 내 삶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제는 사라와 같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속으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에도 반드시 봄날이 온다.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네 인생의 봄날을 줄 것이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과 삶 가운데 반드시 봄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①첫째 우리는 조금만 더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못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못할 일이 없으신데,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무조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하느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어떨 때는 우리가 몇 십 년을 더 기다려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같이 조금만 더 기다려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요셉의 인생 가운데서 제일 어려운 시기가 28-30살까지입니다. 이때 요셉은 모든 사람에게 잊혀진 삶을 살았습니다. 이때 만일 요셉이 조금만 더 참지 못하고 감옥에서 나갔다면 30살 때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조금만 더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30살이 되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광부가 평생을 금광을 팠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말년에 결국 그 금광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금광을 산 사람이 조금만 더 파니까 어마어마한 금맥이 나왔다고 합니다. ②둘째,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라에게 인생의 봄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사라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피식 웃는 웃음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창세기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도 하십니다. (창세17,17)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아브라함도 피식 웃었습니다. 어떻게 백세나 된 내가 자식을 낳을까라고 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입니까?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입니까? 우리가 볼 때 이때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것 같지만 로마서에서는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로마9,19-23)19 이제 그대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을 여전히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20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21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22 하느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힘을 알리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큰 은혜로 참아 주셨다면, 23 그리고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려고 그리하셨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는 인간적인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믿음이란 인간적인 자신감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나는 절대 절망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볼 때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능치 못하실 것이 없으신 하느님은 반드시 이루실 줄을 믿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합니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이 있어야 자녀를 낳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었다면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악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에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합니까? 그래야 우리가 인생의 봄날을 기다리며 오늘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곧 봄이 올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 삶 가운데서도 반드시 인생의 봄날이 옵니다. 그래서 울더라도 기도의 씨와 말씀의 씨를 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인생의 봄날에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 ③셋째, 하느님과 친교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우리 인생에 봄날이 곧 온다는 사실을 믿지만 조금 더 기다려야합니다. 그러면 그때가 오기 전까지 우리가 우울하게 기다려야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봄날이 오기까지 하느님은 우리와 친교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은 인생의 봄날이 오기 전에도 마무레 참나무 숲에서 하느님과 친제하고 있었습니다. 코린도 교회는 어려움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오로는 하느님의 때가 되면 이 코린도교회가 아무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될 것을 기대하고 믿고 있습니다. (1코린1,8-9)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의 때를 기다리는 신랑 신부와 같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 이룰 아름다운 시간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의 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이 무의미하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의 때가 이루어지기 전에도 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으로 친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친교하고 있는 가운데 있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결혼의 때라는 것은 그렇게 조급하지 않습니다. 그때가 언제가 되었건 두 사람이 사랑하고 있으면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게 지겹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봄날이 되는 그 때가 되기 전이라도 우리와 사랑의 친교를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현재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하고 있으면 이제 인생의 봄날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당장 그 때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그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봄날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봄날이 아니라 그 날을 있게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고 있으면 그것으로 내 인생은 만족하며 기뻐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봄날이 되기 전에도 항상 주님과 기쁨으로 친교하며, 또 인생이 봄날이 되기 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최선을 다하고, 또 무수한 고난을 통해서 내 인격과 삶과 믿음을 더 다듬고, 또 하느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면 반드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인생의 봄날이 올 줄 믿고 고대하시며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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