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30) 말씀과 기도(祈禱)를 통한 복(福) (창세18,16-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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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27 | 조회수46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30) 23. 4. 27. 목. 말씀과 기도(祈禱)를 통한 복(福) (창세18,16-33) 16 그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동안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니까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나는 노쇠(老衰)하고 아브라함도 늙었는데 어떻게 내게 자녀를 낳는 즐거움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사라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도 다 듣고 계시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에게 못할 일이 있겠느냐” 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라에게 “네 인생에도 봄날이 올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볼 때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첫 번째 목적은 믿음이 없는 사라에게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두 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받는 비결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창세18,16) 16 그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여기서 그 사람들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온 두 천사입니다. 두 천사는 소돔고모라를 심판하기 위해서 소돔으로 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천사를 전송하기 위해서 천막을 떠나 함께 길을 갑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과 하느님이 지금 마므레 상참나무 숲이 있는 헤브론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가 보이는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보이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17절부터 나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멸망 받을 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지 말고 진정한 복 받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①첫째는 말씀입니다. (창세18,17) 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이사야서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내 벗, 내 친구’라 말씀하십니다(이사41,8). 친구에게는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구로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진정한 복을 받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창세18,18)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18,19)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 의(義)와 공도(公道) 공의(公義)를 행하라 내가 너희를 선택한 것은 너희가 말씀을 지켜 의(義)와 공의(公義)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너희가 말씀을 지켜 의와 공의를 행할 때 내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모든 복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지켜서 의와 공의를 행함으로 복을 우리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선택받았습니다. 우리가 불의하게 살아도 무조건 복만 받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 기복주의(祈福主義)적 신앙입니다. 기복주의적 신앙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말씀대로 하느님의 공의와 정의를 행함으로 복을 받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조건 잘됨이 아니라 옳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세상사람들은 옳음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우리는 옳음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내게 어떤 유익이 있느냐를 따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무엇이 옳으냐를 따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옳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 해도 옳음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옳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5,11). 세상 사람들은 자기편이면 무조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속한 편이 아니라도 옳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가난한 자는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자는 무조건 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탈출23,3.6). 3 또 힘없는 이라고 재판할 때 우대해서도 안 된다. 6 너희는 재판할 때 가난한 이의 권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부자를 옳다 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무조건 옳다고 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또 무조건 다수라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탈출23장2절에서 “너희는 다수를 따라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되며, 재판할 때 다수를 따라 정의를 왜곡하는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소수라고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수와 수수가 아니라 옳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수라도 옳으면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라도 옳으면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옳음을 주장하는 목적은 남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옳음을 주장해야합니다. 그래서 이사야1,27. “시온은 공정으로 구원을 받고 그곳의 회개한 이들은 정의로 구원(구속)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義 체다카)”란 첫 번째 개인적인 차원에서 옳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 나름대로 옳음의 기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신앙의 양심상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 어떤 사람은 제사의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야한다는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제사음식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먹어도 된다는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양심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먹어도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제사의 음식을 먹지 말아야한다는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먹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제사의 음식을 먹지 말아야한다는 양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양심을 어기고 먹으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義)란 두 번째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옳음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속한 공동체의 다수가 제사의 음식은 절대 먹으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리 제사의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해도 공동체의 다수가 먹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공동체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오로도 개인적 양심으로는 제사의 음식을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속한 공동체가 먹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나의 개인적인 옳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공동체의 다수가 옳다고 한다면 그 옳음을 따라갈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란 세 번째 하느님 앞에서의 옳음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동성애(同姓愛)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다수가 그렇게 주장을 해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느님 앞에서의 옳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19절을 다시 보면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義)를 행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공정(公正)이 무엇입니까? 공정(公正)은 미쉬파트라는 말로서 공의, 정의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정, 공의는 공정한 심판과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중국선수는 잘못해도 실격판정을 하지 않고 한국선수는 잘해도 실격판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정한 심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공정에 맞지 않습니다. 선수들은 이 경기를 위해서 4년을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공정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전 세계인들의 공분(公憤)을 쌓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의에 맞지 않습니다. 이사야서1장에서 하느님께서 왜 내가 너희들의 기도(祈禱)와 예배(禮拜)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 고아와 과부 같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이유가 동성애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서 내려오는 야살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한 나그네가 망토를 입고 소돔에 갔습니다. 하루 밤 잠을 자는데, 집 주인이 엄청난 돈인 은3개를 달라고 합니다. 억울해서 재판관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소돔에 사는 집 주인 편을 들어줍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은 3개도 빼앗기고, 망토까지 집 주인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공정, 공의 즉 “미쉬파트”가 가난하다고 해서 억울하게 재판을 하지 않고 과부라고 해서 억울하게 재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공정한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시편50,6). 하느님께서는 가난하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약자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공정(公正)에 따라서 이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너희들은 절대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저버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갑시다. 우리나라가 공정하지 못하고 공의롭지 못한 책임은 선택받은 하느님백성들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창세18,19)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길-데렉).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 하느님의 의와 하느님의 공정을 드러냄으로 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복을 받게 됩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가 복을 받는 비결은 중보기도입니다. (창세18,20-21) 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 크고 죄악이 심히 무겁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야살의 책에 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소돔고모라 사람들은 가난한 나그네가 오면 거의 굶겨서 죽여서 남은 것까지 다 빼앗아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돔 고모라에 오는 가난한 나그네들이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롯의 딸 중에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한 딸이 그들을 도와 준 것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소돔과 고모라사람들이 롯의 딸을 불태워서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심히 무겁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지만 보고 확인하려고 그들에게 내려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공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 말씀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보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하느님의 일방적인 통보처럼 보이지만 오늘 말씀에 보면 의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는 원문을 보면 “내가 무조건 내려가겠다.”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나를 내려가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1인칭 권유형). (창세18,22)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제 천사들이 거기를 떠나 소돔을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심판하러 가시려는 하느님 앞에서 서서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시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기도로 본다면 소돔고모라에 대해서 하느님께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창세18,23)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공의의 입장에서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공의의 하느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일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공의에 맞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간구합니다. (창세18,24-26)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그러니까 28절에서 아브라함은 또 다섯명을 낮추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45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0명, 20명,10명까지 내려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구에 대해서 6번씩이나 심판의 계획을 바꾸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기계적인 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격적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간구에 대해서 얼마든지 뜻을 돌이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로 무조건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무조건 하느님의 뜻만 관철하시려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변경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만일 아브라함의 제안대로 의인 10명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소돔을 멸망시키는 계획을 바꾸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6번씩이나 심판의 계획을 바꿀 수 있다고 하신 하느님께서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심판하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왜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소돔 고모라 땅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인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레5,1) 1 예루살렘 거리마다 쏘다니며 살펴보고 알아보아라.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광장마다 찾아보아라.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찾는 이가 있어 내가 그곳을 용서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라. 이것을 소돔과 고모라에 적용해 본다면 결국 소돔에 진정으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드로후서에 롯이 소돔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괴로워하는 의로운 롯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이 보실 때 소돔전체를 용서할만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말씀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한 사람이겠습니까? 그 성읍에 죄를 끌어안고 그 성읍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는 한 사람입니다. (이사59,16-18) 16 그분께서는 한 사람도 없음을 보시고,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음을 보시고 놀라워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팔이 그분을 돕고 그분의 정의가 그분을 거들었다. 17 그분께서는 정의를 갑옷처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셨다. 응보의 옷을 입으시고 열정을 겉옷처럼 두르셨다. 18 그분께서는 저마다 그 소행대로 갚으시니 당신의 적들에게 분노하시고 당신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시리라. 섬들에게 보복하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 공동체에 ‘공동체의 죄를 하느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중보기도 자 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소돔고모라에 그 성읍의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하느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의인 한 사람만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그 한 사람을 보시고 소돔을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공의대로 하시도록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지었을 때 모세가 어떻게 기도합니까? (탈출32,31-32)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완전히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했던 중보기도자 모세 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에제케엘 시대에도 동일하게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 시대를 멸망시키셨습니까? 하느님의 진노를 막아서는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에제22,30-31) 30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성벽을 보수하며 그 성벽이 무너진 곳에 서서 나를 막는 이가 그들 가운데에 행여 있는지 내가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31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내 격분을 퍼붓고, 내 진노의 불로 그들을 없애 버리겠다. 그들이 걸어온 길을 그들 머리 위로 되갚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무너진 성벽을 어떻게 세울 수 있었음은 이스라엘의 죄를 나의 죄로 여기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던 느혜미야와 같은 중보기도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느님께서 공동체의 죄를 드러내며 비판하는 예언자 노릇하는 의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죄를 나의 죄로 끌어안고 중보기도 하는 제사장 역할을 하는 의인(義人)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가정에 남편은 부족합니다. 자녀들도 아직 신앙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부족을 자신의 부족으로 끌어안고 그 가정을 위해서 눈물로 중보기도 하는 어머니가 있으면 절대 그 가정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처럼 모두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지만 ‘하느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회는 절대 망(亡)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고발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걸레가 되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한 사람의 중보기도 자가 되어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우리나라를 살리는 자들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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