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 토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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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28 | 조회수36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가타리나 성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제1독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주해 32절 루카는 베드로를 이미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지도하는 선교 책임을 맡은 중요한 일들로 그린다. 리따는 예루살렘 요빠 사이에 있는 유다의 한 읍으로서 지방관청이 있는 곳이었다. 35절 시돈은 요빠와 가이사리아 사이의 해변 평야지대다. 리따라는 도시에서의 지엽적인 선교가 한 지방의 선교로 확대묘사된다. 루카가 애용하는 문학기법이다. 36절 그리스어로 도르가라고 번역되는 다비타는 아람어로 영양을 말한다. 아가서에서 영양은 “사랑스런 이”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선행은 자선을 포함한다. 자선은 유다교에서 매우 중시하는 덕이다. 37절 여기서 “그 무렵”이란 베드로가 리따를 방문하던 시기를 말한다. 시체를 씻기는 것은 장례식의 한 절차다. 다락방에 시체를 놉혔다는 보고는 사렘다 마을의 과부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락방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를 반영한다. 38절 둘을 파견하는 초대 공동체의 관습에 대해서는 3.1;8.14; 13.2(루카 10.1 참조). 39절 이 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더 중대한 사건을 위해 고르넬리오에게서 파견된 사람들을 즉시 따라나선다는 10.23의 내용을 미리 준비한다. 40절 “일어나다”는 루카가 예수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도르가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께서 소녀를 살리신 복음서의 이야기와 유사점이 많다. 심부름꾼을 내보냄, 일어나라는 명령, 손을 잡고 일으킴 등. 42절 애네아를 치유한 경우처럼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베드로가 아니라 주님을 믿게 된다. 그들이 목격한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주해 60절 앞서 언급된 제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제자들로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신앙인을 가리키는 초대 그리스도인 용어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말과 함께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도 “유다인들”처럼 알아듣기 어렵다고 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62절 원문에는 없지만 문맥상 이런 질문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인격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의 아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믿는 사람은 예수의 말에 “걸려넘어지지”않는다. 예수의 참된 신원을 알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의 아들”이 들어높여져 영광스럽게 된다면 비로소 예수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더욱 견고케 되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더욱 불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63절 이 구절은 63ㄱ절에 직결된 말이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말들”은 제자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생각한 예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가리킨다. 즉, 그 말씀은 오히려 “영이며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는 시몬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도 고백된다. 그러나 “영”과 “생명”이란 개념을 고려한다면 이 구절은 또한 63ㄱ절과도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은 영과 생명을 지닌 영적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육적 말씀, 곧 인간적 말씀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믿음으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임은 예수의 약속을 전제한다. 아버지로부터 연유된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 물론 그러기 이해서는 믿는 이들이 예수의 말씀안에 머물고, 그 말씀을 보존하여, 그 말씀의 진리로 더욱더 깊게 인도되어야 한다. 64절 영이며 생명인 예수의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제자들, 곧 예수의 말슴에 걸려넘어진 제자들도 있다는 사실이 예수의 입으로 증언된다. 문맥상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재차 촉구한다. 이 촉구에도 불구하고 계속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맥상 제자들이 예수를 배신하고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리라는 말과도 관련된다. 65절 64ㄱ절에 연결된다. 인용된 예수의 계시 말씀은 내용상 44절과 가장 가깝다. 하느님의 은총으로서의 믿음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66절 “이 때문에”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번역은 66절을 65절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다. 예수가 예시한 말이 이제 실제로 이루어진다. 이 사건은 예수가 열두 제자의 믿음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계기가 된다. 예수 곁을 떠난 다른 제자들은 어둠 속을 거니는 자들로서 이제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때부터”란 번역도 가능하다. 67절 제자들이 예수 곁을 떠나간 상황에서 특히 열두 제자에게만 제기된 물음이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는 진지한 물음으로서 항구한 믿음의 격려도 내포되어 있다. 68절 베드로가 열두 제자 대표자로 시사되는 대목은 요한복음에 더러 있다. 예수만이 열두 제자에게 삶의 길과 방향을 제시한다는 뜻으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믿는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63ㄴ절의 내용을 이제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이다. 열두 제자는 예수의 말슴이 어려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말씀을 듣고 알아들이기로 결정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예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을 줄 수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의 자세다. 69절 예수에 대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적 칭호는 공관복음에서도 저자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르다: “그리스도”,“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하느님의 그리스도”그러나 예수의 메시아성을 말하는 데는 일치한다. 예수의 메시아의 칭호는 각 복음서의 깊은 신학적 이해 가운데서 사용된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도 예수의 메시아성을 가리키는 칭호로서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백성식은 우선 예수의 자기계시 양식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 자기계시에 따른 예수의 신적 계시 “나요”,또는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에 상응한 것으로서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란 말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서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의미는 10.36에서 더욱 명확하게 설명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을 때 아들을 “거룩하게”하셨고, 파견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칭해진다. 예수 자신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라고 계시한다. 그러므로 시몬 베드로의 이 메시아 고백은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학적 해설이 가미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부 사본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몸” 대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또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되어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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