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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4주일 가해, 성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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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30 조회수462 추천수2 반대(0) 신고

[부활 제4주일 가해, 성소주일] 요한 10,1-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하원시간이 되면 유치원 앞은 자녀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이 때 참 신기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모두 같은 원복을 입고 같은 모자를 쓰고 같은 가방을 메고 있는데도, 부모들은 멀리서부터 자기 자녀를 정확하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자기 아이 이름을 불러대는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 이름을 부르는 부모의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고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건 아마 ‘사랑의 힘’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기에 그 아이가 다른 누구보다 특별해보이고, 자녀들도 부모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자기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겁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오늘 복음 속 비유의 상황은 아이들이 모인 어린이집에서 부모가 자기 아이를 찾아 집으로 데려가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밤 시간에 양들을 거대한 ‘공동 우리’에 넣어두고 함께 관리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도둑들과 맹수들로부터 양들을 안전하게 지키는데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울타리 밖으로 따로 불러냅니다. 양들이 물을 마시고 풀을 뜯을 수 있는 장소로 데리고 가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양들의 입장에서는 목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그 때가 너무나 기쁘고 설레는 순간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목자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기에 그렇고, 그를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너른 들판이, 시원한 물과 맛있는 풀들이 충분히 있을 것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양들은 그저 다 같은 양일 뿐이지만, 목자에게는 자기 양 하나 하나가 다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목자는 자기 양들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외웁니다. 어떤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기억하며 불러준다는 건 그에 관한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소중히 여기며 간직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양이라도 목자의 사랑에서 소외되거나 차별받는 일은 절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양들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목자가 먼저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자기를 아껴주고 보살펴주기에, 오직 자신만을 위한 그 특별한 사랑에 오직 그만을 위한 특별한 응답과 따름으로 보답하려 하는건 자연스러운 반응인 겁니다. 그래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목자가 자기를 부르면 언제든 그의 곁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의 부름에 즉시 응답하며 곧바로 그의 뒤를 따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알아듣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아쿠오’는 단순히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경청하며 식별하고 이해하는 모든 과정을 다 포괄합니다. 즉 양들은 단순히 목자가 내는 소리를 그저 귀로 듣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주위에서 나는 여러 시끄러운 ‘소음’들 속에서도 목자의 목소리를 분명히 구분하고 식별할 수 있도록 귀와 마음이 목자를 향해야 합니다. 또한 목자가 자신을 왜, 무엇을 위해 부르는지 그 마음과 뜻을 잘 헤아리고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를 따르는 중에 힘들고 괴롭다며 대열에서 이탈하여 ‘길 잃은 양’이 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목자가 앞장서서 가고, 양들이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구원의 행렬’이 시작됩니다. 목자가 양들보다 ‘앞장서’ 가는건 양들에게 닥쳐올 시련과 고난을 미리 마주하여 그것을 이겨낼 방법을 강구하고,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함입니다. 즉, 목자는 사랑 때문에 자기 양들보다 ‘매를 먼저 맞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양들은 목자를 따라가는 그 길에서 시련과 고통을 마주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들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충분히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목자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중간에 힘겨워 넘어지거나 다치더라도 목자가 자기를 일으켜주고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목자만이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먹여살리며, 여러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목자의 모습으로, 자기 양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시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양들인 우리는 무조건 목자이신 주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면 그만큼 근심과 걱정도 커집니다. 그러면 자꾸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목자를 놓치고 헤매게 되지요. 양들이 목자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다른 소리들을 다 걸러내고 오직 목자의 목소리만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 단순하고 우직한 믿음이 있어야 한 눈 팔다가 죄의 구렁에 빠지지 않고 구원의 길을 끝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시편 23편을 보면 이처럼 목자 뒤를 필사적으로 따르는 양들의 절절한 심정이 구체적으로 잘 드러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장 1~4절)

 

우리들 각자는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 부르심에 기꺼이 '예'라고 응답하며 따랐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특별한 소명에로 불러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때로는 내가 가는 이길이 너무 힘겨워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두려울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어둠의 골짜기’를 건너 생명의 나라로 나아가도록 항상 함께 하시며 이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노력한다면, 그분께서 희망의 막대로 우리를 절망에서 일으키시고, 믿음의 지팡이로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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