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34) 진정한 내려놓음 (창세22,1-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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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02 | 조회수47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34) 23. 5. 2. 화 진정한 내려놓음 (창세22,1-18)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믿음이란 하느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신의 가장 귀한 외아들(獨子) 이사악도 하느님께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최고의 절정은 이사악을 낳아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사악 조차도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진정한 내려놓음이 무엇인가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먼저 진정한 내려놓음이란 내 안에 있는 육신(肉身)의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창세22,1)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21장에 보면 ‘이사악이 젖을 뗀 후 친치를 베풀 때 이스마엘이 이사악을 조롱하고 놀리는 일’이 있었습니다.(창세21,8) 17년 동안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사악이 태어나니까 이스마엘은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이사악을 괴롭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합니다.(창세21,10) 그런데 아브라함은 쉽게 쫓아내지 못하고 근심합니다(창세21,11). 왜냐하면 그동안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합니다(창세21,12). 이에 대해서 갈라디아서4장 30절을 보면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자식이 자유의 몸인 부인의 아들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4,22-24)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에 따라 태어났고,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24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난 아들입니다. 갈라디아서4장29절을 보면~ (갈라4,29-31) 29 그러나 그때에 육에 따라 태어난 아들이 성령에 따라 태어난 아들을 박해한 것처럼, 지금도 그렇습니다. 30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자식이 자유의 몸인 부인의 아들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3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같은 육(肉)의 사람이 있고, 이사악과 같은 성령(聖靈)의 사람, 또는 말씀의 사람이 있듯이 우리 안에도 육신의 사람인 이스마엘이 있고, 또 성령과 말씀의 사람인 이사악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이제도 우리 안에도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이 두 사람이 싸우면 우리 안에 육신의 사람인 이스마엘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말씀과 성령의 사람인 이사악보다 육신의 사람인 이스마엘을 더 사랑합니다. 또 창세기에 보면 이스마엘이 이사악보다 나이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이사악보다 이스마엘이 힘이 더 셉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날마다 육신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이 싸우면 우리는 매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네 안에 있는 육신의 사람인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내려놓음은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왜 오늘 본문1절에서 아브라함이 육신의 사람인 이스마엘을 쫓아난 일을 한 후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십니까? 우리가 매일 내 안에 육신의 사람인 이스마엘을 쫓아내지 못하면 진정한 믿음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사람은 매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또 끊임없이 미워하고 싸웁니다. 또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 안에 이스마엘을 쫓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 믿음으로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로마8,5-8) 5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6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7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 안에 육신의 사람을 온전히 내려놓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또 진정한 내려놓음은 나를 완전히 죽이는 것입니다. (창세22,2)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여기서 번제(燔祭)로 드린다는 것은 제물을 죽여서 모든 것을 불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로 드릴 때 제물 위에 안수(按手)를 하고 드립니다. 안수한다는 것은 그 제물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번제의 제물을 죽일 때 자신을 완전히 죽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제를 드리라는 말은 아브라함 자신을 하느님 앞에 완전히 죽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내 모든 삶을 내려놓는 다는 뜻은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번제의 제물과 같이 완전히 죽이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내려놓으면 내 삶이 편하고 더 큰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 어렵고도, 또 쉬운 일입니다. 어렵다는 말은 내가 나 자신을 나의 힘으로 죽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쉽습니다. (갈라2,20)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는데,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네 자신을 죽일 수 있느냐의 시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네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느냐의 시험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가 그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다면 날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죽이고 부인(否認)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내가 내 자아(自我)를 죽이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내려놓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나의 모든 옛 자아가 이미 죽었음을 고백하고, 날마다 자신을 죽이며, 하느님 앞에서 자아를 다 내려놓고 살아야 합니다. 3. 또 진정한 내려놓음은 나의 가장 귀한 것조차도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 앞에 다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입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이 이사악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하느님의 자녀가 태어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이렇게 신앙적인 차원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너무나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차원뿐 아니라 인간적인 차원에서도 이사악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귀한 존재였습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 얻은 아들입니다. 이사악은 첩을 통해 나은 자식이 아니라 본 부인을 통해서 낳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귀한 아들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사악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을 다시 보면 하느님께서는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창세22,2)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이사악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외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악은 지금 아브라함이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하느님 앞에 외아들 이사악을 드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 자신을 드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자녀를 낳아본 부모의 입장에 서 본다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이사악을 하느님께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내려놓음이란 단순히 나 자신만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가장 귀한 것조차도 하느님께 다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 삶에서 가장 귀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물질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명예일 수 있습니다. 또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자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삶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네 삶에 있어서 네 생명보다 귀한 것조차도 다 내게 내려놓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려놓는다는 말이 자포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신과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는다는 말은 결코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과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가장 귀한 아들을 하느님께 드린 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놀라운 일들을 믿고 내려놓았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내려놓는다는 말은 단순히 불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비운다.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살려주실 것을 믿음으로 하느님께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17-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11,17-19)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드린 것은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살려주실 것을 믿는 부활(復活)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런 부활신앙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사악의 출생과정에서 이사악을 죽은 자 가운데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완전히 하느님께 다 내려놓지 못합니까? 왜 우리가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하느님께 다 내려놓지 못합니까? 왜 우리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지 못합니까? 왜 우리의 명예를 다 내려놓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하느님을 온전히 다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발소에 가면 이발사가 칼을 가지고 면도를 합니다. 내 목에 칼을 댑니다. 칼날이 잘 서지 않으면 다시 칼을 갈아서 내 목에 댑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이발사가 내 목을 자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다 믿고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면도할 때 잡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이발사보다 못 믿는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돈 문제를 내 앞에 다 내려놓아라. 너의 명예문제를 다 내려놓아라.” 그런데 절대 내려놓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의 미래문제, 직장문제, 건강문제, 결혼문제, 자녀문제를 다 내 앞에 내려놓아라.” 그런데 절대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 문제들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내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완전히 다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다 내 앞에 내려놓아라. 그런데 내려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교회 주님 되신 것과 그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선하게 이루실 줄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세22,5)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아브라함은 절대 혼자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사악을 하느님께 번제의 제물로 드리지만 이사악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믿고 있습니다. (창세22,7)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제일 아플 때입니다. 사실 번제할 양은 이사악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말합니까? (창세22,8)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장 귀한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내려놓을 때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창세기 17장에 보면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도무지 인간적인 힘으로 이룰 수 없고,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조차도 능히 이루실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도 아브라함의 전능하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갈라3,9) 9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같이)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물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려야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반드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내려놓는다는 말은 하느님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항상 옳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진정한 내려놓음입니다. 내려놓음이란 내 모든 삶을 하느님께 다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 하실 때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날 바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야 산으로 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볼 것 같습니다. 또 그 말씀대로 살면 이 생존경쟁이 치열할 사회에서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직 완전히 하느님 앞에 다 내려놓지 못한 사람의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모든 삶을 다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고 공부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내가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내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습니다. 또 하기 싫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모든 삶을 다 내려놓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내 모든 삶을 하느님 앞에 다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준비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창세22,16-18)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해서 하느님께 벌을 받아서 돌이키는 체험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손해 볼 것 같았는데,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체험이 중요합니다.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직 이런 체험이 없음은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를 잡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원수이 손이 들어갈 만한 조그마한 구멍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 속에 원숭이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먹을 것을 둡니다. 원숭이는 그것을 움켜잡습니다. 그때 사람이 옵니다. 그런데 그 원숭이는 그가 잡고 있는 것 때문에 도망을 가지 못합니다. 결국 그 원숭이는 그가 움켜잡고 있는 것 때문에 자신의 생명조차도 잃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사람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너의 자아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너의 생명조차도 다 주님께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너의 가장 귀한 그 모든 것조차도 다 주님께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명조차도 주님께 다 내려놓는다 해서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를 죽이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가장 귀한 생명조차도 주님께 다 내려놓았을 때 우리를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것조차도 주님께 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것조차도 주님께 다 내려놓았을 때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나의 명예를 주님께 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의 명예를 다 빼앗아가지 않습니다. 명예를 다 내려놓았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명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모든 삶을 하느님께 다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려놓는 우리를 위해서 ‘야훼 이레, 준비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며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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