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38) 누가 진정한 선택(選擇)하신 자녀인가 (창세25,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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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06 | 조회수41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38) 23. 5. 6. 토 누가 진정한 선택(選擇)하신 자녀인가 (창세25,19-34)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의 역사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20 이사악은 나이 마흔에, 파딴 아람에 사는 아람 사람 브투엘의 딸이며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인 레베카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21 이사악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의 아내 레베카가 임신하게 되었다. 22 그런데 아기들이 속에서 서로 부딪쳐 대자, 레베카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주님께 문의하러 갔다. 23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24 달이 차서 몸 풀 때가 되고 보니, 레베카의 배 속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25 선둥이가 나왔는데 살갗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라, 그의 이름을 에사우라 하였다. 26 이어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어,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다. 이들이 태어났을 때 이사악의 나이는 예순 살이었다. 27 이 아이들이 자라서,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 28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29 하루는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에사우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왔다. 30 에사우가 야곱에게 “허기지구나. 저 붉은 것, 그 붉은 것 좀 먹게 해 다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하였다. 31 그러나 야곱은 “먼저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내게 파시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에사우가 대답하였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33 그래서 야곱이 “먼저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 하자, 에사우는 맹세를 하고 자기의 맏아들 권리를 야곱에게 팔아넘겼다. 34 그러자 야곱이 빵과 불콩죽을 에사우에게 주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서는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우는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늘 본문에 이사악의 족보가 나옵니다. (창세25,19)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의 역사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창세기는 족보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족보가 있었고, 노아와 족보가 있었고, 테라의 족보도 있었습니다. 족보란 톨레드토라는 말로서 족보 또는 이야기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이사악의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창세25,20) 20 이사악은 나이 마흔에, 파딴 아람에 사는 아람 사람 브투엘의 딸이며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인 레베카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사악은 늦은 나이인 40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레베카를 만나기 전에 광야에서 하느님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레베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셔서 레베카를 데리고 왔다고 하니까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사악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레베카도 어떤 여인입니까? 아브라함이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고향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간 것처럼 레베카도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고향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이사악과 레베카는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만을 사랑하니까 이사악은 레베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베카도 하느님만을 사랑하니까 900킬로나 떨어진 먼 거리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와서 이사악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창세25,21) 21 이사악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의 아내 레베카가 임신하게 되었다. 이사악은 하느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우물이라 불리는 브헬라헤로이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는 임신하지 못하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자녀가 최대의 재산이었습니다. 또 자녀를 많이 가지는 것이 최대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복을 받았다고 하는 이사악은 결혼을 했지만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앞 12-18절을 보면 이스마엘은 12자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 아닌 이스마엘은 자녀를 열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사악은 결혼을 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사악이 자녀를 낳았을 때 나이가 60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결혼 후 19년 동안 자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택한 백성이 아닌 이스마엘은 12자녀를 주셨는데, 택하신 백성인 이삭에게는 자녀를 주지 않으셨는가? 왜 아브라함의 아내만 아니라 이사악의 아내도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는가?를 묵상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사악과 레베카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사악과 레베카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19년 동안 자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믿느냐, 아니면 말씀을 믿느냐의 시험입니다. 이스마엘은 12아들을 낳아서 번성하고 있는데, 이사악은 19년 동안 한 자녀도 낳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난 자를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자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이사악이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악에게도 네 자손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말씀과 반대의 현실 가운데서 끝까지 말씀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사악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혼을 일찍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처럼 늦은 나이에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또 결혼해도 이사악처럼 19년 동안 한 자녀를 낳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말씀과는 반대가 되는 불의한 현실 앞에서 절대 낙심하지 않으며 기죽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과는 반대가 되는 불의한 현실 앞에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과 같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지만 하느님으로는 능치 못하실 것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사악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아내 레베카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1이사악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의 아내 레베카가 임신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볼 때 이사악이 아내가 임신하지 못함으로 2~3년 정도 기도하고 응답받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능(能)치 못할 것이 없으신 하느님께 19년을 기도하고 간구했습니다. 이때 19년 동안 이사악에게는 아브라함처럼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낳을까 하는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마엘을 낳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그 어떤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음으로 낙심치 않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이사악이 처음 기도할 때부터 들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사악의 기도를 들으신 것과 기도의 응답이 오는 것은 19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이사악은 기도의 응답물이 없어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심을 믿고 19년 동안 낙심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19년이 지나서 리브가가 임신하고 20년째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믿음은 기도의 응답물이 없어도 하느님께서 듣고 계심을 믿음으로 끝까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믿음입니다. (루가18,1.7-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라고 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낙망(落望)치 않고 기도하는 믿음을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사악과 같이 수년 동안 기도의 응답물이 없어도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듣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사악과 같이 십 수 년이 걸려도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기도합시다. 그러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레베카는 기도의 응답으로 자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창세25,22) 22 그런데 아기들이 속에서 서로 부딪쳐 대자, 레베카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주님께 문의하러 갔다. 하느님께서 레베카에게 자녀를 주셨는데 쌍둥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태속에서 서로 격렬하게 싸웁니다. 그러니까 레베카가 하느님께 묻습니다. (창세25,23) 23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이것에 대해서 로마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9,10-13) 10 그뿐만 아니라, 레베카가 한 남자 곧 우리 조상 이사악에게서 잉태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1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택의 뜻을 지속시키시려고, 12 또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이 말씀 앞에 로마서9장 6절이하에 보면 (로마9,6-8) 6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8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8자녀가운데 하느님께서는 이사악만을 선택하여 주셔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악의 자녀라고 해서 모두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의 자녀가운데서 에사우는 버리시고, 야곱만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로마서에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창세기에는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형 에사우입니다. 그래서 에사우는 원래 장남으로 큰 자이고 강한 자입니다. 당시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히 큰 자인 에사우가 섬김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이어받아야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나는 크고 강한 자인 에사우는 미워하고 작은 자인 야곱을 사랑하여 선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 편에서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창세기 25장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8자녀가 있었지만 그들이 다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악의 자녀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택하신 야곱만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 혈통을 가지고 나는 선택받은 자녀라고 하지 맙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인간적인 조건들을 가지고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지 맙시다. 단순히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다고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라고 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느님의 선택하신 자녀인 야곱이 어떤 자인가와 선택받지 못한 자녀인 에사우가 어떤 자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선택한 자녀는 육신의 본능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27-34절을 보면 에사우가 배가 고플 때 야곱이 장자권을 팔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에사우는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의 저자는 “34 그러자 야곱이 빵과 불콩죽을 에사우에게 주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서는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우는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장자의 권리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에사우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가볍게 여기는 자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12,16) 16 그리고 아무도 음식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복)를 팔아넘긴 에사우와 같이 불륜을 저지르거나 속된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히브리서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판 에사우를 육신의 본능대로 음행(불륜)하는 자와 같이 보십니다. 에사우는 육신의 본능대로 사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가볍게 여기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단순히 육신의 재산을 많이 가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야곱은 장자의 권리를 가짐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복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느님 저에게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고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이제 내가 육신의 본능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집안의 혈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진정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지 맙시다. 내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해서 내가 진정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지 맙시다. 이사야에서는 형식적으로 누구보다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66,3-4)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3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자가 사람을 쳐 죽이고 양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자가 개의 목을 꺾는다. 곡식 제물을 올리는 자가 돼지 피를 바치고 분향제를 드리는 자가 우상을 찬미한다. 이들이 제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네 역겨운 우상들로 기꺼워하듯 4 나도 그들에게 가혹한 것을 선택하여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들이닥치게 하리라.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아무도 없었고 내가 말하여도 그들은 듣지 않았으며 내 눈에 거슬리는 짓만 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만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서 66장 2절에서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 한 자가 진정한 택하신 자녀입니다. 심령(心靈)에 회개(悔改)함으로 애통(哀痛)에하며 회개하는 자가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가 진정한 택하신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를 하느님께서 돌보실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과 같이 위로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하고, 마음(심령)이 애통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진정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 되어서 날마다 하느님의 평안을 누리며 하느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살아갑시다. 둘째, 하느님의 선택한 자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27절에 야곱이 온순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순한 이란 단순히 온순하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온순한 이란 “탐”이라는 말로서 욥기에 보면 욥이 온전하다고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욥기1,1). 심지어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욥에 대하여 “온전하다”고 말씀하실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보실 때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내게 주신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육신의 복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가 아닌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그 무엇을 빼앗아 가시면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입니다. 욥과 같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 오직 하느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택함 받은 자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 하느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가 되어서 그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심으로 선택하신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셋째,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는 섬기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큰 자인 에사우는 버리시고, 작은 자인 야곱만을 선택하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 말씀은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진정한 택하신 백성은 섬기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인 야곱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섬기는 자가 아니라 더 많이 가짐으로 군림하는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평생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죽기 직전에 하느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자녀인 에브라함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큰 자인 므낫세에게는 왼손으로 작은 축복을, 작은 자인 에브라임에게는 오른 손으로 큰 축복을 줍니다. 이때 요셉이 야곱에게 “아버지 손을 잘못되었습니다. 큰 자에게는 큰 축복을 주시고, 작은 자에게는 작은 축복을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때 야곱은 “아들아 내가 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자인 아우가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창세48,19). “나는 평생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의미를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알았다. 섬기는 자가 큰 자다. 져 주는 자가 이기는 자다” 는 말입니다. 로마서8장 29절에 보면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미리정하시고 선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의 택하신 자녀라면 더 낮아지고 더 섬기는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갑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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