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6주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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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5-14 | 조회수40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부활 제6주일 가해] 요한 14,15-21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어떤 결혼식에서 주례 선생님이 신랑 신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나이 서른을 넘기면 고쳐서 쓸 수가 없습니다. 그저 보태서 쓸 뿐 입니다. 그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을 내가 보태서 채워주는 겁니다.” 참으로 공감되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상대방을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억지로 고치려고 드는지요? 그렇게 무리하다가 서로 마음을 다치고 감정이 상해 관계가 틀어지고 마는지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어른이 되도록 그대로 굳어진 모습은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바뀌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는게 중요합니다. 그 사랑으로 그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내가 기꺼이, 기쁘게 채워주면 됩니다. 그러면 상처를 입을 일도, 감정이 상할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고, 둘이 함께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그 방식으로만 나를 사랑해달라고, 그래야 나를 사랑하는줄 알겠다고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국가가 당신에게 뭘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를 물으라”는 존 F. 케네디의 말처럼 내가 먼저, 주님을 위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을 드리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받고자 하시는 ‘최선’의 사랑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게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단 하나, 당신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끝까지 충실히 걸어 구원받는 것,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 뿐이며 그렇게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실천한 그 사랑이 주는 좋은 효과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셈입니다. 먼저 베풀지만 누구도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가장 완전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완전한 사랑을 끝까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꾸준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힘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보호자’를 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라클레토스’(Par¢kletos)입니다. 요한 복음에만 나오는 이 단어는 법정용어로서 ‘가까이 불린 이’라는 뜻입니다. 매섭고 차가운 법의 심판대 앞에서, 의지할 이 하나 없이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피고인 곁에 앉아서, 그의 입장을 대변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변호자를 가리킵니다. 그의 존재가 피고인에게는 너무나 큰 위로와 힘이 되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존재, 즉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모두가 나의 잘못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여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거 같은 막막함과 고독을 느낄 때,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며 힘을 주시는 분, 마치 내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신 것처럼 나의 슬픔과 아픔, 불안과 걱정을 완전히 이해해주시고 깊이 공감해주시며 그것을 이겨낼 힘을 주시는 분을 우리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중 그 누구도 고아처럼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당신께서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할 때 뿐만 아니라, 그가 고통과 시련의 무게에 짓눌려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지도 못하는 절망의 순간에도 사랑의 힘으로 그와 함께 머물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순명으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셨고,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며,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의 힘으로 서로가 서로 안에 머무르는 것이, 그렇게 해서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모두 함께 누리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 일치에 이른 이들은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정의와 불의의 ‘대립’으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선을 지향하되 악을 미워하지 않고 회개로 이끌고, 정의를 외치면서도 불의에는 함께 아파하며, 진보의 개혁을 보수의 안정으로 균형 잡으며 함께 발전해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인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대충 넘어가라는게 아닙니다. 모든 이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함께 머물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자신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삶과 행동으로 드러낸 사람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을 거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은 애매한 관념이나 모호한 느낌으로가 아니라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표징으로 느끼고 깨닫게 될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미루거나 주저하지 말고, 복잡하게 재고 따지며 계산하려 들지 말고, 일단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고 실현되는지를 믿음의 눈으로 지켜봅시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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