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51)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창세38,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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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5-19 | 조회수31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51) 23. 5. 19. 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창세38,1-11) 1 그때에 유다는 형제들과 떨어져 내려와, 히라라는 이름을 지닌 아둘람 사람에게 붙어살았다. 2 유다는 그곳에서 수아라는 이름을 지닌 가나안 사람의 딸을 만나 아내로 삼고, 그와 한자리에 들었다. 3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유다는 그 이름을 에르라 하였다. 4 그 여자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였다. 5 그 여자는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였다. 그가 셀라를 낳을 때 유다는 크집에 있었다. 6 유다는 맏아들 에르에게 아내를 얻어 주었는데, 그 이름은 타마르였다. 7 그런데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주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8 그래서 유다가 오난에게 말하였다. “네 형수와 한자리에 들어라. 시동생의 책임을 다하여 네 형에게 자손을 일으켜 주어라.” 9 그러나 오난은 그 자손이 자기 자손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수와 한자리에 들 때마다, 형에게 자손을 만들어 주지 않으려고 그것을 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 10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그도 죽게 하셨다. 11 그러자 유다는 자기 며느리 타마르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 셀라가 클 때까지 너는 친정에 돌아가 과부로 살고 있어라.” 그는 ‘이 아이도 제 형들처럼 죽어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마르는 친정으로 돌아가 살게 되었다. 혹시 가나안 신자(信者)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데,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聖徒)를 가나안 성도(냉담자, 쉬는 성도)라고 합니다.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가 하면 교회를 다니다가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실망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창세38,1) 1 그때에 유다는 형제들과 떨어져 내려와, 히라라는 이름을 지닌 아둘람 사람에게 붙어살았다. 앞에서 형제들은 동생인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창세기37장 26절과 27절에서 유다가 “우리가 동생을 죽이면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이 되겠느냐, 그에게 손을 대지 말고 팔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던 야곱은 창세기37장 34절과 35절을 보면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요셉을 위하여 애통해합니다. 그리고 너무 슬퍼서 아들과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늘 본문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 부터 떠났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내려와”라는 말은 지리적으로 내려간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족인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합니다. 유다가 왜 신앙의 공동체를 떠났겠습니까? 왜 그의 신앙이 내려갔겠습니까? 왜 하느님께 가까이 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과 가까이 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보기 싫었습니다. 동생 디나가 스켐에서 강간을 당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동생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잔인한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장자인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첩을 범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창세기37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요셉만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생 요셉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또 이런 모습이 미워서 형제들이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유다 자신도 형제들과 함께 동생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모두가 보기 싫었습니다. 아버지도 형제들도 동생들도 모두 실망입니다. 또 자신도 실망스럽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신앙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이때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과연 교회인가?”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보다 믿지 않는 친구가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친구 히라와 가까이 합니다. (창세38,2) 2 유다는 그곳에서 수아라는 이름을 지닌 가나안 사람의 딸을 만나 아내로 삼고, 그와 한자리(동침)에 들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결혼시킬 때 믿지 않는 가나안 여인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악도 야곱에게 믿지 않는 가나안 여인과는 결혼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어떤 고민도 없이 믿지 않는 가나안 사람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합니다. 분명히 유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이사악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믿지 않는 가나안여인과 결혼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적인 반항입니다. 유다는 “할아버지 이사악이 믿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라고 하는 마음으로 믿지 않은 사람과 결혼합니다. (창세38,3) 3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유다는 그 이름을 에르라 하였다. 그리고 4절과 5절에 보면 둘째 아들 오난과 셋째 아들 셀라를 낳습니다. (창세38,6) 6 유다는 맏아들 에르에게 아내를 얻어 주었는데, 그 이름은 타마르였다. 유다가 장자 에르를 위하여 타마르를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유다의 장자 에르가 야훼하느님 보시기에 악하므로 야훼께서 그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유다가 둘째 아들인 오난에게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형을 위하여 자손이 있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근동 당시에 있었던 형사취수법(兄死娶嫂法)에 근거한 것입니다. 형사취수법이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5장 5절에서도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고 합니다. 이렇게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야 하는데, 그 자녀는 본인의 자녀가 아니라 형의 자녀가 됩니다. 9절에서 오난은 형수에게서 낳은 자녀가 자기의 자녀가 되지 않을 줄 알아서 이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그 일이 야훼하느님 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느님께서 둘째 오난도 죽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셋째 아들과 결혼을 해야 하는데, 셋째 아들이 나이가 어립니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타마르에게 수절하고 친정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창세38,12) 12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수아의 딸, 유다의 아내가 죽었다. 애도 기간이 지나자, 유다는 아둘람 사람인 친구 히라와 함께 팀나로 자기 양들의 털을 깎는 이들에게 올라갔다. 그때 13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며느리 타마르에게 ‘네 시아버지가 자가 양털을 깎으려고 팀나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때 며느리 타마르가 창녀로 분장을 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들이 죽으면 형제들이 아니면 시아버지를 통해서도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마르는 대를 잇기 위해서 창녀로 분장을 했습니다. (창세38,15) 15 유다가 그를 보았을 때,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창녀려니 생각하였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실망한 유다가 믿지 않는 친구 히라를 따라가다가 처음에는 믿지 않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죽지 나중에 창녀를 찾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유다는 며느리 타마르가 창녀인줄 알고 그에게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을 줍니다. 그리고 유다가 들어가 타마르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3달이 지나서 며느리 타마르가 행음(行淫)하였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래서 24절에 유다는 며느리가 행음하였으니 당장 불태워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5절에서 타마르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라고 합니다. (창세38,26) 26 유다가 그것들을 살펴보다 말하였다.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 애를 내 아들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는 그 뒤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유다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유다의 위대성을 발견합니다. 유다의 위대성이란, 그가 그 어떤 죄를 짓지 않고 정결하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유다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 여자를 불태워 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애가 나보다 옳다” 고 합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창세기37장에서 야곱의 족보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요셉이 애굽의 친위 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39장 1절에서 요셉을 보디발이 샀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흐름상 창세기38장은 없어도 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38장은 우리가 보지 않고 넘어가야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어떤 말씀도 우리에게 필요 없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창세기38장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다가 또 사람들 때문에 우울해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다가도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을 더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 (이사2,22) 22 너희는 더 이상 인간에게 의지하지 마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무슨 가치가 있느냐?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말라는 이유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서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에게서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또 유다와 같이 죄악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혹시 교회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고 그것 때문에 상처가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한이 되십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갑시다. 일본문화는 원(怨)의 문화이고 한국문화는 한(恨)의 문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공동체를 통해 상처를 받으면 원(怨)을 가지고 사무라이 정신으로 칼로 죽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내적인 상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공동체를 통해서 상처를 받으면 한(恨)을 가집니다. 한(恨) 이란 아픔이 있어도 그것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안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병이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 사람들은 그 한을 종교와 예술로 승화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그 한 때문에 하느님을 찾습니다. 또 그 한이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됩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면 예술적인 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문화가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도 우리 안에 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한을 예술로 승화했습니다. 우리도 유다처럼 믿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한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절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하는 그 이유는 사람에게 대한 상처와 한이 도리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욥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 고통이 쉴 자리는 찾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과 상처가 도리어 우리가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왜 우리가 상처가 있어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우리에 있는 그 상처가 우리의 신앙을 더 성숙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사람들을 떠나서 수도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기도,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상처 때문에 더 성숙해가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래서 유다와 같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받은 그 상처 때문에 세상 사람에게 가지 말고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 바랍니다. 한나와 같이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기도로 승화시키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찬양으로 승화시키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상처들을 통해서 더 놀랍게 역사 해주십니다. 왜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은 이 땅의 교회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연약함이 보입니까? 부족함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단죄하지 말고 또 그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말고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더 사랑하고 헌신할 조건과 기회로 삼읍시다. 둘째, 사람이 실망스러워도 하느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1,2)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야곱의 아들가운데 가운데서 누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의 대표가 됩니까? 여기서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이 유다지파가운데서 다윗 왕이 나옵니다. 또 유다의 지파 가운데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을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유대인은 유다지파 사람들입니다. (창세37,2) 2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살 난 요셉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 목자였는데, 아버지의 아내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파의 아들들을 도와주는 심부름꾼이었다. 요셉은 그들에 대한 나쁜 이야기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야곱의 역사(족보)는 이러하다.” 고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창세기38장에서 왜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까? 그 이유는 유다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의 대표인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가 창녀인 줄 알고 그와 관계를 하였던 사람입니다. 이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선택받고, 구원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자기가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그런 인간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간사하고 속이기를 잘하고 그런 인간입니다. 또 우리는 유다처럼 세상의 풍조에 휘말려 얼마든지 범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며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절대 우리의 잘남이나, 똑똑함이나 거룩함이 아니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함이나 감격함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 되고,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인가를 극렬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 미사예배에 나오십니까? 습관 때문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 봐야 합니다. 이사야가 그랬듯이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그 하느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도 하느님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의롭고 똑똑하고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미사예배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현존 앞으로 나아가면, 그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더러운 시궁창에서 나와서 하느님의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갑니다. 실재로는 내 더러운 오물이 점점 없어져 갑니다. 그러나 그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실재로는 내가 더 깨끗한 사람이지만, 그 하느님의 밝은 불빛아래서 내가 느낄 때에는 오히려 더 더러운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죄인인가.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기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보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내가 잘나서 괜찮아서 또 너무도 당연히 하느님의 자녀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내 죄를 보게 되니 “오 하느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사랑하셨습니까? 오 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에게 오래 참으셨습니까? 오 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 주셨습니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살면 살수록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보다는 오늘이 내일보다는 다음날이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더 풍성히 누리고 깨달아 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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