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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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5-25 | 조회수30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요한 17,20-26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창세기 11장을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그 때, 인간은 하나로 힘을 합쳐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들, 즉 생명과 능력 덕분이었지만, 자신들이 이뤄낸 성과에 마음이 흡족해진 그들은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고, 자신들의 능력과 힘을 온 세상에 과시하고자 하늘까지 닿는 높은 탑을 쌓겠다는 헛된 욕망을 품게 되지요. 하지만 인간들의 속셈을 알아차리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민족과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를 쓰도록 갈라 놓으심으로써 그들의 헛된 계획을 수포로 돌리십니다. 그들의 능력을 두려워하셔서 그러신게 아닙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들끼리만 ‘하나’가 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만과 고집, 욕심과 집착,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모두 함께 멸망으로 치달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전에 그 헛된 욕망의 탑을 무너뜨리심으로써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신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없이 인간들끼리 하나가 되려하는 헛된 시도는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지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과 죄인들은 무시하고 배척하였으며 비난하고 단죄했습니다. 또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맞는 이들과는 뭉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 로마라는 힘에 저항하는 이들, 죽은 이들의 부활을 주장하여 현재의 욕망을 제한하려는 이들은 배척하거나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그분에 대한 올바르고 굳건한 믿음을 중심으로 하나되는 참된 일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강조하신 부분이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라는 말씀을 통해 설명하시는 ‘일치의 원리’입니다. 내가 상대방 마음 안에 있고 상대방이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를 내 기준이나 생각을 가지고 판단하거나, 억지로 내 틀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 또한 나를 그렇게 그의 마음 안에 받아들이기에 그와 나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며 사랑하는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그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고 그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인 일심동체의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지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이루고 계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그 일치 안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가 그분과 일치해있어야 종말의 순간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하느님 나라, 즉 천국은 모든 것이 풍족하게 갖추어져서 충만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낙원' 같은게 아닙니다. 그런 낙원을 약속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은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하는 일이지요.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인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내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 거룩함, 선함, 영원함, 완전함을 나도 함께 누리는 상태가 바로 천국인 겁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위와 지향과 뜻으로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아직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지금 여기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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