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6월1일은 예수성심성월 첫날이자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빛나는 순교영성입니다. 마침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본 사제에게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의 사랑을 지닐 것을 권하며 드린 말씀입니다.
“오늘 5월31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자 ‘신부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네요. 내일부터는 예수성심성월, 6월말까지 보속으로 다음 말씀처방전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참으로 깨달음의 은총을 통해 마음의 눈이 열려갈수록 날로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 갈 것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던 분들에게 모두 오늘 형제(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라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두말할 것 없이 오늘 강론 제목을 “개안의 여정”이라 했으니 이 또한 자주 반복되어온, 제가 참 좋아하는 제목입니다. 정말 내적성장은, 영적성장은 날로 눈이 열려 밝고 맑은 심안(心眼)을, 영안(靈眼)을 지니는데 있음을 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개안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상징들로 풍부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소경을 고치시는 아름다운 장면은 그대로 복음의 요약같습니다. 예루살렘 도상에서 예리코에 들어갔을 때 길가에 앉아있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전광석화(電光石火) 부르짖습니다. 그가 얼마나 구원을 갈망하며 주님을 찾았는지 단박 드러납니다. 참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주님이십니다.
길을 잃고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그대로 가난하고 무지한 인간 실존의 상징입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은 길을 읽고,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를 잃고 현실의 늪에서,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무지와 탐욕의 사람일 것입니다.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갈망하는 바르티매오는 가난과 무지의 상징이자 동시에 하느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활짝 깨어 있던 바르티매오의 영적 촉수에 닿은 예수님 소식입니다. 아, 바르티매오가 갈망에 깨어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예수님은 나를 지나쳤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주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를 놓쳤을까요! 바리티매오의 갈망이 집약된 기도가 답입니다. 우리가 바칠 단 하나의 기도는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자의 겸손한 기도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여기서 유래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자비송으로 참회와 동시에 시작되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금같은 구원의 기회를 놓칠수 없어 거듭 애타게 부르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입니다.
“그를 불러 오너라.”
예수님은 직접 부르지 않고 이웃을 통해 그를 부르십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많이 좋은 분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지요!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복음의 압축같은 말씀으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는 겉옷을 버리고, 즉 자기를 안팎으로 묶어놓은 모든 내외적 구속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안주와 타성, 무기력과 무의욕, 무감각의 숙명의 늪에서 분연히 일어나, 과거에서 탈출하여 새롭게 자유인으로 시작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바르티매오입니다. 주님과 주고받는 본질적 깊이의 대화가 마치 선사들의 선문답같고, 예전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소원이 절박하고 간절하면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무지의 눈이 열려 열린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제대로 보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갈망의 믿음과 주님 은총의 말씀이 만나니 개안의 기적입니다. 결코 갈망의 믿음이 없는 주님 은총의 일방적인 치유 기적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마침 생각나는 법정 스님의 사부였던 한국 불교의 거목, 효봉스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가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석두 큰 스님을 만나러 금강산 신계사를 찾았을 때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걸음에 왔는가?”
효봉 스님은 방안을 한바퀴 돌며
“이렇게 왔습니다.”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
며, 그 자리에서 계를 내렸다는 일화입니다.
효봉의 간절한 원의를 직감했기에 즉시 제자로 받아들인 석두 스님입니다.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는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떠나니 정말 소원성취했습니다. 주님을 ‘보라고’ 있는 눈이요,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개안이 여정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개안이 아니라 평생 살아 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개안의 여정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은 물론 제1독서 집회서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면 세상 모든 피조물에서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집회서의 저자, 정말 개안의 인물입니다.
“당신 지혜의 위대한 업적을 질서 있게 정하신 주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같은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며, 어떤 조언자도 필요없다. 그분의 업적은 모두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
완전히 영안이 열려 피조물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는 집회서의 저자는 말그대로 각자(覺者)요 견자(見者)입니다. 오늘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역시 성 유스티노의 생애도 그대로 개안의 여정에 일치합니다. 말그대로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여정이자 개안의 여정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지만 여전히 갈증에 목이 탄 그는 어느날 카이사레아 바닷가를 산책하던중 한 노인을 통해 완전히 무지의 눈이 열려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 입교했고 숱한 순교자들의 삶에 감동받으며 복음의 사도로 일하다가 6명의 동료와 순교합니다. 성인은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요 철학자이자 교부였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