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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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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3-06-07 조회수453 추천수7 반대(0) 신고

 

2023년 6월 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성당, 피정의 집, 성지, 성체 조배실….

이런 곳을 우리는 기도하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곳으로 떠올립니다.

실제로 이런 곳이 도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더 쉽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런 곳에서만 계실까요?

우리가 많이 바치는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성당에만

계신 분도 아니고, 피정의 집이나

성지, 성체 조배실에만

계신 분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에는 안 계신다는 것일까요?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있습니까?

물론 실내에 있으면 자기 눈에

하늘이 보일 리 없겠지만,

이 건물 위에도 하늘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가 잘 보입니다.

나의 시력 때문에 잘 안 보일 뿐이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서도 계신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려면,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두가이들은

스스로 이런 함정에 빠져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지상의

삶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맺은 살아 있는 관계에 ‘

속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람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을 세상의 논리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세상의 판단 아래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한 원하는

참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그대의 행운의 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그 별이 있다. 불행은 자신의 별을

알지 못하기에 찾아온다.

(발타사르 그라시안)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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