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주님에 의해 죽는 것이 승리(勝利)다. (마르12,1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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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6-07 | 조회수22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주님에 의해 죽는 것이 승리(勝利)다. (마르12,18-27)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 복음은 왜, 사람이 반드시 후손을 낳아야한다고 할까? 원시 복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세3,15) 15 나(하느님)는 너(뱀)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 여자(교회-성도)는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말로 먹게한 뱀, 그 뱀의 선악의 심판으로 자신에게 죄를 짓게(죽게) 한 그의 머리(생각)를 밟아, 그 뱀의 생각인 거짓말(선악)을 없애줄 후손(구원자,예수)을 반드시 낳아야(깨달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다. 곧 부활 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마리아처럼 반드시 우리의 죄를 대속 할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야(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원시복음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루가24,27.46 사도28,23 참조) 그래서 본문이 후사를 낳아야한다는 표현보다 *후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 성경을 하느님의 뜻으로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뜻으로 잘못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 우리가 생각하는 성가정이 하늘에는 없다.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로, 같은 형제자매가 된다. 그렇게 새 성가정이 된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먼저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보자- 다른 신의 상(우상)을 만들어 부자로 살았던 그 불가능의 아브람을 찾아가시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만들어(구해)내신 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시다.(여호24,2 사도7,2 참조) 하느님께서 후손이 없던 아브람에게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으나 그 약속은 듣지 않고 아브람은 계속 자신의 뜻, 힘, 방법으로 자식을 낳으려 애쓴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의 고집,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의 나이 100세에서야 후손 이사악을 주신다. 그때서야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깨닫고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린양 일곱 마리와 브엘느세바(일곱샘), 곧 안식(7)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구해내실, 하느님의 일곱, 그 구원의 약속을 깨닫게 된다.(창세21,30-34참조) 그 아브라함(믿음)의 하느님이시다. 믿음을 만들어 내신 하느님 이시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통해 태어난 이사악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죽이려)했던 그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명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 이사악의 하느님이시다.
(창세22,2-3)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골고타의 줄기)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 외아들(獨生子) 예수님도 나귀를 타고 죽음을 향해 가셨다.
(창세22,6)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 대속의 제물(번제물)로 태워질, 죽어질 그 십자나무(장작)를 예수님도 친히 지고 가셨다.
(창세22,9-10)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 힘이 있던 젊은 청년 이사악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늙은 아버지를 밀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사악은 순명했다.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 이사악(예수)의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사악을 살리신다. 예비하셨던 숫양을 대신 번제물로 바치게 하시고 *그리고 이사악의 아들 야곱이다. 아버지와 형을 속여 맏아들의 권리를 차지하고, 도망갔던 야곱이다. 그의 이름 그대로 ‘그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 속이는 자였다. 그래서 도망가 살았던 외삼촌에게 속고, 속이는 삶을 살았다. 그 후 야곱은 외삼촌에게서 다시 도망 나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자신에게 속아, 맏아들의 권리인 하늘의 복을 빼앗긴 형이 두려웠다.
그래서 가족들을 앞서 보내고 기도를 하게 되는데~ (창세32,24-29) 24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하느님)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6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 속이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승리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물론 야곱(이스라엘)이 이긴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긴 것으로 간주해 주신 것이다.
(창세32,31-32) 31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이라 하였다. 32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 야곱은 절뚝거리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그의 승리이다. 하느님의 지팡이, 곧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 말씀이 야곱(죄)에서 이스라엘(하늘)로 재창조로 구(求)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으로 살다가 늙어서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스라엘로 산다. (창세46,1) 하느님께서 계속 쫓아 다니시면서 이끄신 것이다. 그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결론-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들은 모두 육적으로는 죽었으나 하느님 안에서 영으로 살아있는 ‘산 사람들’이다. 우리 또한 아브라함처럼, 이사악처럼, 야곱처럼, 하느님의 지팡이 곧 구원, 그 약속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야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내 뜻, 고집, 자아를 부인하고, 죽이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산(生) 이요, 승리(勝利)인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길이다.
(1코린15,57)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산 이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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