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1주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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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6-18 | 조회수47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11주일 가해] 마태 9,36-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독일의 남서쪽에 위치한 ‘슈바르츠발트’ 지역에 가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모양의 십자고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로대 없이 세로대만 남은 그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두 팔이 절단되고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있지요. 그 지역 사람들이 그런 독특한 모양의 십자고상을 제작하는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그 마을에 있던 성당이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는데, 그 충격으로 십자가에 달려있던 예수님의 두 팔이 날아가고 폭탄의 파편이 심장을 통과하여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입니다.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전쟁의 아픔이 떠올라서 얼른 멀쩡한 새 것으로 바꾸고 싶었을거 같은데, 그곳 사람들은 그 팔 없는 십자고상을 마을의 전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폭력으로 두 팔을 잃어버린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고 계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의 손 외에는 다른 손이 없다.” 그 메시지를 마음 깊이 새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팔이 되고 손이 되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 온 세상에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기쁜 소식을 전할 이들을 선발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될 이들은 그분께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곳 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마귀를 쫓아내시던 예수님이 문득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의 원래 뜻은 “창자가 움직이다” 혹은 “내장이 찢어지도록 아프다”라는 뜻입니다. ‘연민’이나 ‘동정’처럼 안쓰러움을 느끼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이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을 함께 느끼기에 그 대상을 향한 사랑이 그저 마음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상대방의 아픔을 몸으로 함께 느끼며 그와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셨습니다. 자식이 병에 걸려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가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는만큼 우리와 깊은 일치를 이루어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아픔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함께 느끼셨던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우리는 그분의 그 따스한 공감능력을 닮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건,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가 꺾이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흐립토’는 ‘지쳐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고된 세상살이에 지쳐 넘어진 이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려고 한 것이지요. 참으로 살기에 힘들고 팍팍한 요즘 세상입니다. 그놈의 코로나만 어찌 잘 넘기면 괜찮아질거라 생각하며 견뎠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불황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티기가 참으로 버겁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능력이 부족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 근심과 걱정, 가난과 결핍에 시달리는 수많은 이들이 내뱉는 한숨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제 마음까지 저 깊은 땅 속으로 푹 꺼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저를 가슴아프게 만드는 건,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곁에 있는 이웃과 형제의 아픔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차가운 심장’을 지닌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더 늦기 전에 이 현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를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내 안에 담고 또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닮으라고 제자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네 명은 고기잡이 밖에 할 줄 모르는 무식한 어부였고, 한 명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리였으며, 그들 중에는 심지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부족한 이들에게 예수님은 ‘사도’라는 거룩한 직무를 부여하신 후, 질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엄청난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족함과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이 드러나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을 품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 부족하고 약한 나라도 못할 일이 없구나, 하느님께서는 나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특별하게 여겨주시고 참된 행복으로 불러주시는구나, 그러니 그런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겠구나’.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신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선포하는 그 ‘기쁜 소식’이 그저 말로만 그친다면 듣는 이들의 마음에 참된 기쁨을 불러일으키지도, 그들을 마음에서 우러나는 참된 회개와 하느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변화로 이끌지도 못합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하느님께 받은 은총과 사랑을 기꺼이, 기쁘게 나누는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에 주님께 합당한 값을 지불하고 은총과 사랑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별한 자격도, 이렇다할 능력도 없는, 어느 모로 봐도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그 크고 귀한 선물들이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인양 사유화하고 나 혼자만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위해 유용해서는 안됩니다. 돈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안겨주라고 만들어져서 ‘돈’인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마음을 닮아 이웃 형제 자매들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과 그분 뜻을 아는 우리를 통해 세상 구석구석까지 흘러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토록 큰 은총과 복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은총과 사랑을 베푸신 그 선한 목적이 비로소 완성되는 거니까요.
혈액이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흐르지 않고 어느 한 곳에 고이면 혈관이 막히고 썩어 큰 병이 생깁니다. 그 병이 심해지면 결국 내 생명까지 위협받게 되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풍족하게 주신 건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나누어서 잘 씀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담아두는 ‘그릇’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흐르도록 전해주어야 할 ‘통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콩은 물 속에 잠기면 썩지만, 물을 흘려보내면 맛있는 콩나물이 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욕심과 집착에 잠겨 썩지 말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싹을 틔우고 자라는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의 사도’라는 소명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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