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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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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05 조회수493 추천수3 반대(0) 신고

230705.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오늘은 우리나라의 첫 사제요, 한국 사제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대대로 순교자를 낸 신심 깊은 집안에서 1821년 충남 당진 솔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솔뫼는 그의 증조부(복자 김진후 비오), 부친(성 김제준 이냐시오)을 포함 4대 11명이 순교의 꽃을 피운 곳입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사위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들을 국경을 넘겨 보낸 국사범으로서 온갖 잔악한 형벌을 받은 후에 서소문 밖에서 목 잘려 순교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3남매 중 맏아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 진실한 신심을 드러냈던 신부님에 대해 모방 신부님은 “이 아이는 아마 천주께서 선택하신 아이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1836년, 열다섯 살 때에 세례를 받은 그는 모방 신부가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자, “남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고국을 떠나(1836.12) 육로로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1837.6)하여 4년간 철학과 신학 공부했습니다. 만주에 들른 그는 북경으로 가던 신자 김 프란치스코로부터 기해박해로 아버지는 참수를 당하고 어머니는 교우집을 떠돌아다니며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앵베르 주교가 기록했던 박해의 기록과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편지, 그리고 목자를 보내줄 것을 청한 교우들의 편지를 받고, 그 길로 조선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를 만나기 위해 변문을 향했습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입국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장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서 선교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마침내 1845년 1월에 온갖 고생을 겪고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셨습니다. 그러나 홀로된 어머니도 뵙지도 못하고, 전교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해 몸이 불편한 중에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다시 상해로 갔고, 1845년 8월 17일에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후, ‘라파엘’ 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밤낮으로 열심히 사목하는 동시에 선교사제의 서해 입국 통로를 개척하다가, 1846년 6월 5일에 체포되셨습니다. 신부님은 당신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학문을 아깝게 여긴이들이 인재로 쓰려고 수차례 회유를 하지만, “천주를 숭배해야만 한다. 이를 거절하면 죄를 면치 못한다.”고 답했으며, 교우의 이름을 대라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거절했습니다. 신부님은 모진 문초를 받으면서도,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잃지 말고 하느님을 섬기며 고통을 참으라고 옥중편지를 통해 이렇게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천주를 알지 못하면 산 보람이 없습니다. 눈물로 씨 뿌린 농부가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듯 신앙도 좋은 열매를 맺을 때 천국의 기쁨을 누립니다. 박해를 두려워 말고 천주를 섬기고, 순교자들을 기억합시다. 성인들의 발길을 따라 교회에 충실한 시민이 되고, 사랑의 일치로 주님 만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1846년 9월 16일,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1개월 만에 한강가의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참수의 거룩한 순교의 빨마를 얻으셨습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신앙의 씨앗은 여전히 한국의 신자들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조선대목구 제3대 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이면 어느 누구나 그의 열렬한 신앙심과 성실한 마음에 존경심과 사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고, 늘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49년에 한국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정되셨고, 1984년 5월 6일에 성인으로 시성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때문에” 모진 핍박과 수난 속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임금으로부터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도 “임금 위에 또 천주께서 계시어 당신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그의 배반함은 큰 죄악이라, 임금의 명령이라도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용감히 증거했습니다.
 
참으로 살 때나 죽을 때나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만 살고, “예수님 때문에”만 죽으셨습니다. 마치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서처럼, 살아있을 이유도 핍박을 받고 죽을 이유도,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성인의 “옥중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참으로 “예수님 때문에” 고문을 받으셨고, “예수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새남터에서의 마지막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으니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건 오직 천주님과 교회를 위함입니다. 나는 죽으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으시려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참수될 당시, 칼로 여덟 번 목을 친 뒤에야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전해지는데, 칼을 든 열두 회자수 망나니가 목을 치기 위해 무릎의 꿇려 머리를 잡아당긴 상황에서 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모양으로 하고 있으면 칼로 치기가 쉽겠느냐? 자, 준비가 다 되었으니 쳐라.”
 
성인께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오로지 예수님께 희망을 거셨습니다. 참으로, 성인께서는 <제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시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셨습니다.’(로마 5,2-3).
 
이제 우리 역시, 다름 아닌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서, 매순간을 “순교”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증거”, 곧 우리의 “순교”가 우리의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연속되는 죽음 속에 자리 잡아야 할 일입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나 자신의 뜻에는 스스로 죽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명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2고린 4,10-1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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