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분별력의 지혜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전글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다음글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1|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08 조회수399 추천수4 반대(0) 신고

분별력의 지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어제 7월7일 오전은 격월로 있는 서울 수녀원 월피정중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매번 수도원 미사에 참석하는 자매가 자기 차로 미사 즉시 수녀원에 태워다 주니 얼마나 고맙던지요. 마침 하우스 오이밭에 잘 생긴 오이가 있어 새벽에 둘을 따 두었다가 하나는 자매에게 드리고 하나는 수녀원 전례 담당 수녀에게 드리니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오전 내내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드리며 한분한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살며 성찰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한없이 자비롭고 너그러워야 하겠다는 다짐을 많이 했습니다. 보속으로는 모두에게 오늘 강론 묵상과 더불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한 하루를 살라 했습니다. 끊임없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마태복음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제 읽은 자비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자비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를 하느님과 닮도록 만듦으로써 자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자아, 그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 준다. 자비는 우리의 이기심에 대한 가장 완전한 적수이다. 이기심의 거칠음에 반대해서 자비는 우리를 민감하고 사려 깊게 만든다. 그 옹졸함에 대해 자비는 그 넓이와 친절함으로 대체한다. 그 조급함에 대해 자비는 그 평온함과 항구함으로 대체한다.”(정념과 덕 43쪽)

 

새삼 자비야 말로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창세기 이야기가 흥미진진합니다. 사라도 아브라함도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어 이사악과 레베카가 등장합니다. 이사악은 큰 아들 에사우 편이었던 듯 싶고, 레베카는 작은 아들 야곱 편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와 작은 아들 야곱이 공모하여 눈이 어둔 이사악으로부터 에사우가 받을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 참으로 교활하고 기민하여 순박한 이사악과 에사우가 감쪽같이 속임당하는 모습이 참 어처구니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유로운 섭리가 상상을 초월하여 이해 불가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 지요! 그대로 우리에게는 믿음의 시험試驗, 믿음의 시련試鍊이 됩니다. 끝까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믿음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겸손과 의탁의 믿음이 절실합니다.

 

이후 주인공은 에사우가 아닌 야곱이니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런 죄과로 인한 야곱의 인생이 참 파란만장하나 야곱은 참 치열하고 적극적으로 타개해갑니다. 최선을 다한 삶이요 충분히 보속하고도 남는 삶이었습니다. 제가 호감을 갖는 것은 야곱보다는 오히려 에사우입니다. 

 

예전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만 에사우의 동생 야곱에 대한 처신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동생에 대한 에사우의 처신이 참 관대하고 너그럽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야곱의 치열한. 항구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위험한 순간들을 피하게 해 주셨고 마침내 형제간의 해피엔딩의 감동적인 만남을 이뤄주십니다. 한참후 창세기 33장에 나타납니다.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

“아닙니다.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이 선물을 제 손에서 받아 주십시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자, 일어나 가자. 내가 앞장서마.”(창세33,9-12)

 

얼마나 자비롭고 너그러운 에사우의 모습인지요! 동생 야곱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하다고 고백하니 에사우가 얼마나 존엄한 품위를 잘 유지해왔는지 그대로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인간 품위를 지켜낸 에사우가 내심 미안하기도 하고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야곱의 운명이, 에사우의 운명이 다 다르듯 결코 비교하여 질투할 것도 없이 각자 고유의 모습에 충실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자기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와 사랑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편협한 시야의 옹졸한 요한의 제자들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자비가 절대적 가치라면 단식은 상대적 가치를 지닐뿐입니다. 자비로 구원받지 단식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단식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는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한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주님과 함께 있는 혼인잔치 같은 축제인생의 때에는 삶을 즐기고 신랑을 빼앗길 그 날에 단식해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어 발상의 전환을,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누구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누구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다 보존된다.”

 

자비가 지혜입니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이 바로 새 부대입니다. 늘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새 부대가 바로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수록 늘 새 포도주를 담아낼 수 있는 자비롭과 너그러운 새 부대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래야 노년에 꼰대라는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미사은총이 주님을 닮아 날마다 새 포도주에 새 부대의 삶을, 자비롭고 너그러운 삶을 살게 합니다. 예전 1997년 3월에 써놓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향한

 내 사랑 날로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날로 자비로워지고 너그러워지는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