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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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15 | 조회수35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 마태 10,24-33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려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서는 안되고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올바르게 식별하도록, 그 두려움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도록 이끄시려는 겁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을 잃게될까봐 염려하는 ‘상실’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요. 무엇인가를 잃게될까봐 걱정하는 것은 그것의 소유권을 지닌 ‘주인’이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지불하고 ‘따릉이’를 빌려타는 사람이 ‘자전거가 망가지면 어쩌나’하고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도를 한참 넘는 ‘오지랖’일 뿐입니다. 그럴 시간에 자신이 직면한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걱정하는게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요한 문제가 바로 ‘구원’이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니고,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봐야 죽고나면 아무 쓸모없는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일랑 내려놓고, 죽음 이후에 마주하게 될 영원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분, 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 전체를 섭리하고 다스리시는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그 관계의 바탕이 되는 것은 ‘두려워함’ 즉 경외심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벌주고 멸망시킬까봐 두려워서 비굴하게 그분의 비위를 맞추라는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리를 멸망시키실 수 있는 힘을 지니셨지만 그러기를 원치 않으시는 자비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사랑에서 우러나는 효심으로 기꺼이 당신 뜻을 따르기를, 그 순명의 삶이 우리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으며 그 믿음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바람대로 사는게 참 어렵습니다.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의 나태함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일단 피하고 싶은 우리의 약함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을 믿는 내가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만, 나에게 고통이나 불행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아야만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낮은 차원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이를 고통과 시련에서 무조건 보호만 하는게, 온실 속의 꽃처럼 안전하고 편안하게만 키우는게 참된 사랑이 아님을, 넘어져 우는 아이가 혼자 힘으로 일어설 때까지 지켜봐주고 기다려줘야 아이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음을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막상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내가 그 ‘아이’의 입장이 되면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땅에 떨어지도록 방치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당신을 믿기만 하면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안전을 보장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여 땅에 떨어져 다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운이 없어서, 혹은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게 아니라 다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가장 좋은 계획 안에서 그렇게 하신 거라고 믿으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손바닥 위에서 삽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특별한 이유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어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평화를 누립니다.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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