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된 삶, 영원한 삶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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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7-15 | 조회수498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참된 삶, 영원한 삶 -하느님 중심의 삶-
12년전 돌아가신 셋째 형님의 혜안慧眼에 감탄합니다. 아들들에게 주었다는 정직, 효도, 우애 가훈의 세 말마디중 첫째의 덕목 정직입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지내는 그러나 참으로 첫째로 놓아야 할 덕목이 정직입니다. 참된 삶, 영원한 삶의 우선적 조건이 바르고 참된,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삶입니다. 정직한 삶 자체가 구원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정직한 삶입니다. 셋째 형님은 세례자 요한 예언자처럼 의롭고 정직하게 사셨습니다. 아주 예전 18년전인 2005년에 써놨던 ‘사랑하는 내 형님은’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올 팔월에 정년퇴직을 앞둔 세례자 요한 내 형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시다 옛날 시골에서 그 어렵다는 사범학교를 나오셨다 술 담배 일체 안 하시고 오로지 가정과 학교 일에만 전념하셨다 아들 셋에 손자가 둘인 할아버지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젊어 평생을 열정의 청년교사로 사셨다 세월도 형님을 비켜갔다 법없어도 사실 참 선량하고 순수한 분이시다 이 점에서는 내 요셉 큰 형님도, 베네딕도 둘째 형님도 똑같다 생각만 해도 자랑스럽고 든든한 형님들이다 구십 노모를 모시고 계시며 때때로 목욕도 시켜드리고 손톱 발톱도 깎아 드리는 보기 드문 효자이시다 요즘은 신앙에 맛들여 내 강론과 시도 빼놓지 않고 읽으신다 인터넷에서 강론을 읽으신 후 꼭꼭 틀린 글자들은 정정하여 이메일로 보내 주신다 천생 타고난 자상스런 선생님이시다 요즘도 가르치는 일에 마지막 열정을 쏟으시는 형님은 동생인 내가 방문할 때마다 꼭 마중나오시고 떠날 때는 버스 터미널까지 나와 차표를 사주시고 또 몇만원 주머니 속에 슬며시 넣어주신다 그리고 차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흔들어 주고 돌아가신다 어렸을 때는 가장 많이 싸운 그러나 싸운 후엔 곧장 까맣게 잊어버렸던 다정하면서도 열정 가득한 사랑하는 내 바로 위에 세례자 요한 세째 형님이시다”
2011년 7월 5일 장례미사때도 나눈 시입니다. 세상을 떠났지만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 영원한 삶을 사셨기에 지금도 제 마음엔 물론 세 아들들 마음에도 좋은 추억들로 가득히 살아계신 형님입니다. 엊그제는 세째 형님 대신에 큰 아들인 조카 프란치스코가 거금을 제게 주었고 마침 생각난 18년전 시였습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맨먼저 가르칠 자녀교육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신앙교육인 것입니다. 참사람되는 공부의 첫째가 바로 하느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우선적인 결정적 요소가 부모의 신앙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삶을 보고 배우면서 비로소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공부가, 신앙이 있어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성인다운 참삶입니다. 광야인생, 이런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막 함부로 살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될 수 있고,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재앙이, 불행이 괴물이요 폐인입니다. 그래서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바, 선택-훈련-습관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총이나 구원은 없습니다. 죽을때까지 은총과 더불어 부단히 사랑도 이렇게 노력하고 훈련할 때 비로소 참나의 성인입니다. 성서의 위인들이나 교회의 성인들이 바로 참된 삶, 영원한 삶의 모범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립자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기념일입니다. 13세기 당시 도미니코회의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지적인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프란치스코회의 영적인 세라핌 박사 성 보나벤투라가 좋은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성인의 보나벤투라 이름도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각별한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전설적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잘 왔노라”, “좋은 소식이로다”라는 의미로 보나벤투라를 봤을 때 프란치스코 입에서 저절로 타져나온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기도 성인의 작품입니다. 성 보나벤투라가 추기경 서임시 일화도 그의 겸손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추기경 서임 칙서를 전하러 교황사절이 도착했을 때 성인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설거지가 다 끝날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성인은 참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삶입니다.” 대답했다 합니다. 한 할머니가 “수사님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서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요.” 칭찬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하고 대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참으로 치열히 살다가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공의회 참석중 1274년 7월15일 새벽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물론 다수의 동서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57세 나이에 병환으로 선종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요셉의 형님들에 대한 관대한 처사가 감동적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신앙을 보고 배워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을 닮은 멋진 삶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꿈이 꿈쟁이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하느님은 굽은 선들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이 또 감동입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요셉은 죽습니다. 앞서 야곱의 죽음 장면에 대한 묘사도 거룩한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게 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리를 다시 침상위로 올린 뒤, 숨을 거두고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렇게 한생을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다 거룩한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할자가 몇이나 될런지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잃어버린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혼없이, 생각없이 자기를 잊고, 잃고 사는 이들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죽어있는 유령같은 좀비같은, 괴물이나 폐인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육성처럼 들립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하다.”
정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신 생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초연하여 영원한 삶을 삽니다. 그는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순교성인들이 영혼 승리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경외할 때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세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참으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서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삶이 참된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향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되고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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