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늘 나라의 삶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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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7-23 | 조회수362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하늘 나라의 삶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인내와 겸손- "귀 있는 시람은 들어라"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참으로 늘 열려 있는 하늘 나라의 비유라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대로 우리 삶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아름다운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모습이,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 깨닫고 배웁니다.
결론하여 예수님은 늘 하늘 나라의 참삶을 사셨던 지혜로운 관상가이자 신비가이자 활동가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하늘 나라는 결코 죽은 정적靜的 현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중동靜中動의 생명의 현실, 성장과 성숙의 역동적力動的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은 제3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코로나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아가야 할 과제를 부여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깨닫는 바는 하늘 나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일도 중요하지만 공부, 특히 독서를 권합니다. 동영상도 좋지만 독서를 통한 공부는 더욱 필요하고 좋습니다. 분별의 지혜를 위해 인터넷 검색檢索이 아닌 독서를 통한 사색思索의 훈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신앙도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 성인이 되는 공부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라면 매일미사책을 통한 매일 미사전례문을 읽고 묵상할 것을 권하며, 적어도 ‘가톨릭신문’이나 ‘가톨릭평화신문’중 하나를 구독하여 읽을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어제는 강론 준비를 위해 두 신문을 대략 읽어봤는데 정말 내용이 풍부하고 유익했습니다. 광고에 나온 ‘가톨릭 조부모 학교 신앙학교’의 신앙전수법에 관한 내용도 아름다웠습니다.
“꿈꾸며 열매 맺는 인생여정의 영적 자존감, 공감과 경청의 예술로 만드는 영적우정의 대화, 저 너머를 바라보며 삶을 조각하는 동행의 말씀, 미래 세대에게 열린 하느님 사랑의 집 지구”
이대로의 노년이라면 그대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뿌리가 튼튼해야 꽃도 열매도 충실합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노년 어른들의 하늘 나라의 삶을 젊은 이들이 보고 배우니, 노년의 삶은 젊을 때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마침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이한 두봉 주교님의 한면에 걸친 인터뷰 기사도 풍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었습니다. 1929년생이니 만94세의 노인이지만 참 정정했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당부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항상 빛나는 존재입니다. 항상 ‘기쁘고 떳떳하게’ 사십시오.”
‘기쁘고 떳떳하게’ 주교님 삶의 모토입니다. 그대로 하늘 나라를 살고 계신 주교님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노년입니다. 또 하나 부탁입니다. 오늘 제3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에 대한 교황님의 담화문을 소리내어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어제 인터넷에서 전부 출력하여 정독했는데 정말 아름답고 깊고 풍부한 내용으로 영적독서에도 최고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명문이지만 젊은이들과 노인들 모두에 해당되는 한 대목만 인용합니다.
“우리 모두 앞을 바라봅시다! 타성과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를 세세대대로 벗어나게 해주시는 하느님 은총으로 우리가 빚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깁시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를 잘 들여다 보면 주인공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하느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관상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지혜서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말고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당신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의 힘이 정의의 원천입니다. 당신은 힘의 원천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 자녀들에게 안겨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주인공이 되십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 주시어 하늘 나라를 잘 깨달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성부 하느님에 대해, 제2독서 바오로의 로마서는 성령에 대해, 그리고 복음은 성자 예수님께서 주시는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모두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의 비유에서 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닮는 일이자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덕목들입니다. 어제 빛두레에서 읽은 한 대목입니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말했습니다.” 새삼 좋은 덕목의 의식적 선택과 한결같은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사람꼴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들로부터 배운 것은 셋입니다.
첫째, 희망과 기쁨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우리 삶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의 설렘이 있습니다. 문제는 가라지들인데 이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때문에 희망과 기쁨이 질식되어선 안됩니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농약이 거름이 없어도 줄기차게 자라는 잡초들, 그리하여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입니다.
참으로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잡초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밀세력을 상징하는 진선미眞善美의 세력을 부단히 키우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겨자씨의 성장과 성숙도 밀가루를 부풀리는 누룩도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의 표징이 됩니다.
말씀의 겨자씨도 될 수 있고 말씀의 누룩도 될 수 있습니다. 희망과 기쁨의 겨자씨, 희망과 기쁨의 누룩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 각자는 물론 우리 요셉 수도원도 겨자씨가 누룩이 됨을 깨닫지 않습니까. 설립후 만35년동안 작은 겨자씨 같은 공동체가 얼마나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한 나무로 되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들처럼 날아 와 깃들이는 지요! 26년전 1997, 3월에 쓴 ‘사랑’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정주생활의 기적입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26년전 시를 오늘 강론에 인용하다니요! 참으로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둘째, 자비와 지혜입니다. 역시 자비와 지혜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자비와 지혜로 요약되는 하느님입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자비가 바로 지혜입니다. 셋의 비유에서 배우는 바, 역시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공존공생共存共生의 자비와 지혜를, 균형과 조화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가라지 악은 원인불명의 현실입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 밀을 다칠 수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가라지 인줄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밀과 가라지는 서로 뿌리들이 엉켜있어 뿌리뽑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발본색원한다며 범죄와의 전쟁도 했지만 승리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가라지 세력의 척결을 위한 혁명도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가라지 세력은 결코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할 일이 부단한 영적훈련의 습관화로 내안의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비요 지혜입니다.
언젠가 밀로 변할 가라지도 있을 것이고 언젠가 가라지로 변할 밀도 있을 것이니 심판은 자비와 지혜의 주님께 맡기고 자비와 지혜의 마음으로 공존공생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요 부단한 자비와 지혜의 훈련과 습관화를 통해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자비와 지혜의 훈련에 소홀하면 악의 잡초세력은 선의 밀세력을 압도할 것이며 이때는 개인도 공동체도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겨자씨의 성장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잘 보살피고 거름을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불필요하게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고 잘 지켜보는 것입니다. 누룩 역시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이또한 자비와 지혜, 감사의 마음으로 묵묵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일 좋은 것은 우리 자신이 자비와 지혜의 밀이, 겨자씨가,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의 빛, 지혜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힐 것이니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셋째, 인내와 겸손입니다. 역시 인내와 겸손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사랑, 겸손한 믿음, 겸손한 사랑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바로 겸손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가라지들 속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는 지극한 인내와 겸손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께 가라지 세력의 심판을 맡기고 겸손히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라지 악의 세력을 뽑아버리려는 무모한 교만은 재앙의 뿌리가 됩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참으로 인내와 겸손의 믿음이, 사랑이 답입니다. 겨자씨로 상징되는 덕목들과 사람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과 겸손뿐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누룩이 삶을, 공동체를 부풀리게 하기 위해서도 인내의 기다림과 겸손은 필수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를 살고 싶습니까? 주님은 오늘 고맙게도 죽어서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자유롭고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인내와 겸손이 답입니다. 이 덕목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끊임없이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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