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죽은 신앙과 살아 있는 신앙의 갈림길은 어디서 결정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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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3-07-25 | 조회수39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요즘 신학적인 내용과 영성적인 내용이 복합적으로 된 영성서적을 하나 정독하고 있습니다. 아는 신부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신 책입니다. 선물은 선물인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다 읽고 난 후에 독후감을 써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서야 책을 다 읽었습니다. 내용이 상당히 깊은 내용이라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조금 난감하긴 합니다. 이 책을 읽고서 독후감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읽고 가장 먼저 선명하게 제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걸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을 한다면 바로 '죽은 신앙과 살아 있는 신앙의 갈림길은 어디서 결정되는가?'로 정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신앙을 가지거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신앙을 가진다고 할 때 '가진다'의 의미는 소유의 표현입니다. 법에서는 소유라는 개념과 점유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법학에 비유를 하면 설명이 조금 쉬울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소유는 자기 것이라는 개념을 정당화시켜주는 법률적인 권원, 힘이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그게 법률적으로 정당하면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유는 형태는 소유의 형태이지만 이건 이탈하면 즉, 점유하는 상태가 아니면 점유가 아닙니다. 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소유권이 박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적인 법률적인 관점에서는 소유권과 점유권 둘 다 아니면 각각 하나만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을 가지고 제가 읽은 신앙서적에서 말하는 개념을 한번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신앙은 소유도 해야 하지만 권원적으로는 점유가 항상 수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붙어 있다고 했지만 포도나무라는 영역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의 상황입니다. 그럼 예수님과 하느님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신다고 한다면 우리의 위치는 어떤 영역에 있을까요? 가령 예를 들어서 표현하자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몸의 소유권은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 어느 누구도 이 소유권을 배제시킬 법적인 힘을 주장할 수 없을 겁니다. 근데 문제는 소유권은 하느님께 있지만 세상적인 법의 논리를 잠시 빌려서 인용하자면 민법에서 말하는 '점유취득시효'로 소유권이 이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전혀 이것과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이 내용을 접목해서 묵상해보니 많은 유익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살아 있는 신앙과 죽은 신앙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이신 신부님은 신앙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자면 '변화'를 꼽고 있습니다. 제가 변화라고 표현을 했지만 이 변화는 다른 말로 표현을 하자면 '성장'입니다.
단순히 말장난 같지만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성장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변화가 수반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성장하기 전과 성장한 후에는 당연히 서로 다른 모습이겠지요. 세상에서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변화없는 반복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늘상 하는 대로 하다보면 그냥 매너리즘에 빠져서 시계추와 같은 현상처럼 그저 늘 하는 그대로 어떤 액션을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신앙은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는 하나의 여정입니다. 여정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목적지에 가까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도 여전히 출발선상에서 얼마 가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겁니다. 마치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연상하면 쉽게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성적표라는 게 있습니다. 성적표는 단순히 성적을 나타내주는 역할을 하는 지표에도 해당하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결과도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적표가 갖는 의미는 이 성적표 하나로 모든 과정을 다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냉혹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정확한 내용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했다고 항변해도 성적표 앞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신앙도 그럴 것 같습니다. 신앙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식품이 아닌 것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묵상해봤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주 많이 속이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말은 우회적인 표현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속을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하느님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짓으로 어떤 사실을 포장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한몸처럼 행동을 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따로국밥'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가령 이런 것입니다.
자기는 한평생 하느님을 잘 믿었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는데 나중에 그 결과물인 성적표를 받아봤을 때 어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책의 저자이신 분은 기쁨과 환희로 행복감을 얻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확률은 아주 희박할 수 있다는 약간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단순한 논리입니다. 누구나 초보신앙을 지나서 어느 정도 초신자 타이틀을 떼게 되면 신앙의 지식적인 유무를 떠나서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치로서도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잘 믿고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는 다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런 판단을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자기만족의 신앙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람의 눈으로 특히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실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책에서 느낀 바는 많이 있지만 그걸 다 표현을 하기엔 역부족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서 내린 최종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또 신앙생활도 잘하고 있다고 하는 많은 착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장문의 글 몇 자로 제가 읽은 영성서적의 내용을 다 담아내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한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부족하지만 공유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내용도 조금씩 정리를 해서 부분 부분 묵상한 것을 차차 공유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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