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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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7-29 | 조회수365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환대와 섬김의 사랑-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1.6)
오늘 화답송 시편 34장이 참 은혜롭습니다. 화답송 시편 처럼 주님 찬미의 맛으로, 기쁨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아마도 최고의 미완의 예술작품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늘 부족한 공동체 삶에도 강론에 참 많이 주제로 사용했던 공동체 영성입니다. 삶은 여정임을 확인할 때 앞에 반드시 “더불어(together)”를 붙여 더불어의 여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공동체의 중요성일 것입니다. 주님 중심의 환대와 상호보완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35년 동안 여기 요셉 수도 가정 공동체에서 정주하면서 점차 분명해지는 사실은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일 것입니다. 지금도 2년전에 써붙인 글귀가 여전히 집무실 게시판에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평생 탐구하고 배워야 할 가장 큰 스승인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입니다. 오늘 기념일의 명칭이 참 깁니다. “주님의 손님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2021년 1월 26일, 그러니까 2년전 그동안 마르타 기념일로 지내던 축일을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삼남매 성인을 기리는 축일로 바꾸니 얼마나 풍요로운지 이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업적입니다. 개인이 아닌 더불어의 공동체성이 잘 드러나는 축일입니다. 경신성사성의 발표문중 핵심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집에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가족 정신과 우애을 경험하셨고, 이런 까닭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너그러이 환대를 베풀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온순하게 경청했으며, 라자로는 죽음을 굴복시키신 분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즉시 나왔다.”
변경된 축일 명칭이 얼마나 합당한지 감탄하게 됩니다. 베타니아의 성녀 마르타, 성녀 마리아, 성 라자로 가정 공동체는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교회 공동체의 모범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수도 가정 공동체 역시 베타니아 삼남매를 닮아 주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환대와 상호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제가 삶의 좌표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좌우명 고백기도시 한 대목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참 많이 강조했던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요,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학인이요, 평생 주님의 형제에 대한 삼중 신원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주님의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 공동체에 몸을 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가 창조적 긴장 가운데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이상적인 사랑의 수도가정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강조할 바 사랑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요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 이것이 우리의 삼중 신원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중심인 사랑의 주님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영원한 사랑의 모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강조하는바 사랑이요, 늘 들어도 새롭고 공감이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이런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순수한 사랑, 이타적 사랑, 집착없는 이탈의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바로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평생 선택하여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역시 사랑 공부에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배움입니다. 평생 배움터에서 평생 겸손히, 한결같이 평생 배워야 할 사랑의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환대의 사랑, 경청의 사랑, 상호섬김의 사랑, 상호보완의 사랑을 배우는 우리들이요 이런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공부중의 평생 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입니다. 그리하여 수도자의 기본적 자질을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이라 정의합니다.
우리는 우선 무엇보다 오늘 주님의 삼남매 공동체로부터 환대와 섬김의 사랑을 배웁니다. 관상의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고 섬기는 마리아요, 활동의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고 섬기는 마르타가 환상적 조화를 이룹니다. 또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마르타로부터는 주님의 신원을, 성녀의 신앙 고백을 배웁니다. 다음 주님과 마르타의 대화가 우리에겐 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참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은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주님은 마르타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한 진리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단절된 영혼의 죽음, 영원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일 때 영원한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두려운 병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우리의 고백을 대변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깊이 섬겨온 환대와 섬김의 성녀, 사랑의 활동가 마르타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영광스럽게도 이런 사랑의 주님을 환대하여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한몸 공동체를 이뤄 살게 하시고, 한결같이 당신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로 살게 하시며 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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