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7주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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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30 | 조회수403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17주일 가해] 마태 13,44-52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혼자서 국보 12점, 보물 10점이나 되는 많은 문화재들을 되찾아온 인물이 있습니다. 전형필이라는 사람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으로 조선의 아름다운 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작품들을 사들였습니다. 그가 모은 작품들은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그린 그림 등 그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아꼈던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었다고 합니다. 그 자료 덕분에 한글의 자음들이 인간의 구강구조를 본따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우리 언어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6.25 당시 피난을 갈 때에도 그것을 가슴에 품고 다녔고, 누가 훔쳐갈까봐 항상 베개 밑에 두고 잘 정도로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어떤 대상이 지닌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이 그만큼의 값을 지불할 줄 아는 법입니다. 또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며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따라 그것을 위해 나를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가가 달라집니다. 조상들이 남겨준 민족의 보물을 소중히 여겨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었던 전형필님의 숭고한 삶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느님 나라’라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과 희생을 하고 있는지요?
오늘의 전례 독서에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참된 보물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먼저 제1독서인 열왕기에서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그분 말씀을 듣는 겸손한 마음을 청하는 솔로몬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옳고 그름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나를 이끌어주시는 그분의 손을 잡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그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과 함께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은총과 복을 세상의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고 중요하게 여겼기에, 그분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이며 따르는 겸손과 순명의 마음을 청한 겁니다. 세상의 보물들이 탐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구원을 위한 ‘배수의 진’을 치고 하느님께만 올인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라는 보물이 지닌 참된 가치와, 그것을 얻고 누리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첫번째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귀한 보물을 땅 속에 깊이 묻어 숨겨두었는데, 전쟁과 그로 인한 피난이 잦다보니 보물을 숨겨둔 주인이 목숨을 잃거나, 그것을 묻어둔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렇게 ‘잊혀진 보물’의 소유권은 현재 그 땅의 주인에게 있었기에, 혹시라도 다른 농부가 그 땅을 개간하다가 보물을 발견하면 먼저 그 밭을 사야만 합법적으로 그 보물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배경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지요. 이 비유에서 보물을 찾아낸 이는 그것이 자기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며 고이 간직했던 재물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여겼기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보물이 묻혀있던 밭을 삽니다. 그 보물이 지닌 참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기존에 누리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는 과감한 결단과 실행은 불가능하지요. 바로 그런 결단과 실행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에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기쁨, 그분 뜻을 따름으로써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안다면, 세상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하느님 쪽으로 점점 기울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좋은 진주 자체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 진주가 지닌 참된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있는 사람이 곧 하느님 나라라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질이나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상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순명함으로써 그분과 일치되어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기쁨과 행복을 나도 함께 누리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사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 진주 상인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상인이란 어떤 물건을 가능한 한 싼 가격에 구매하여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팔아서 큰 이윤을 남겨야 하는 것인데, 그런 계산이나 가격 흥정의 과정도 없이 자기가 가진 전부를넘겨주는 모습이 참으로 의아하게 보이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정말 미련한 사람은 그 상인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까지 계산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들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들은 어차피 하느님 나라에서 아무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덜 내려놓기 위해 이리저리 재고 따지며 전전긍긍하기보다,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해드려야 그분과 함께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겠지요.
신앙은 최소의 가치를 지불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최대의 이윤을 얻어내는 ‘거래’가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과 함께 하는 기쁨을 최고로 여기는 자세로 나라는 존재 전체를 그분께 내어드리는 전적인 ‘투신’입니다. 신앙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가진 것을 다 처분하는 것은 그 보물을 취득할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질적인 가치를 지불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다 처분하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온전히, 최대한으로 누리기 위함입니다. 소유한 게 많을수록 세상 일에 대한 걱정과 집착이 커지기에, 그런 걱정과 집착이 클수록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는데에 방해가 되기에, 기꺼이 다 내려놓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것을 다 빼앗으시려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부’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에 은총과 복을 꾹꾹 눌러담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더 많이 내려놓을수록 더 큰 보상으로 되돌려 받을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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