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희년(禧年)의 영성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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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8-05 | 조회수44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희년(禧年)의 영성 -인간의 해방, 경제적 해방, 생태적 해방-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9,147;117,2)
오늘 제1독서 레위기는 희년에 관한 내용으로 참 풍부한 영감을 줍니다.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 역사에 대한 거시적 영적 안목을 갖게 합니다. 거시적 안목과 정체성 형성에 역사, 도덕, 국어 교육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요! 오늘날 교육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들은 이런 기본적 과목의 소홀에 있음을 봅니다. 도대체 역사, 도덕 교육이 너무 부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70년대 20대 중반의 청년교사로 초등학교 6학년생을 세 번 가르칠 때 도덕, 역사 교육에 온 열정을 쏟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어제는 ‘지정학의 힘’에 이어, 틈틈이 대략 속독으로 이희호 평전을 독료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더불어 외교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지정학의 힘’은 이미 윤대통령이 취임하기 2년전 2020년 11월에 나온 책이고, 이희호 평전에서 김대중의 외교에 대한 탁견은 2009년 타계하기 전 자서전에 나온 소견입니다.
2009년 한국은 큰 두 별이 사라졌으니 김수환 스페파노 추기경(2009.2.16.)과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2009.8.18.)입니다. 두분 다 거시적 안목을 지닌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진정 두분은 겸손과 지혜, 용기를 겸비한 애국자였고 인류를 사랑한 분들이었습니다. 시절이 하두 어수선하니 옛 큰 어른들이 그립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회고입니다.
“참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었지요. 추기경님은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셨지요. 남편이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면회하시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찾아가셨어요. 우리가 어려울 때 생활비를 주시고도 하고요.”
이희호 평전에 소개된 김대중의 외교의 중요성에 대한 탁견에 감탄하며 공감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만은 제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국처럼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외교가 가장 필요한 나라다. 외교가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외교는 명줄이다. 한반도는 4대 강국의 이해가 촘촘히 얽혀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도랑에 든 소가 휘파람을 불며 양쪽의 풀을 뜯어먹을 것인지, 열강의 쇠창살에 갇혀 그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인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역시 이희호 평전에 나오는 감동적인 김대중 대통령의 회고담입니다. “나는 감히 예수편에 서려고 했다. 진정한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
‘진리에 대한 헌신!’, 까맣게 잊고 지내기 십중팔구이지만 용기의 원천이자 위대한 인간의 특징입니다. 지정학의 힘이 지정학의 덫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정학의 힘’에 나오는 거시적 안목의 탁견이 일품입니다.
“강대국들의 우선적 관심은 자국의 현실적 국익이다. 미국, 중국, 일본은 분단되고 대립하는 한반도를 원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나설 이유가 없다. 가장 시급한 과제가 남북한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한반도 전체의 역량을 결집해도 주변 강대국들에 비해 부족한데 분단되고 대립되어 남북상호간에 역량을 소모하는 현재 상황은 최악이다. 남북한이 적대적으로 대립하여 약해진 한반도를 누가 원하는가? 강대국들이 원한다.
특정 강대국에 편승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의 욕망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정학적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남북한 모두에게 지정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희년의 영성을 공부하면서 희년의 거시적 영적 안목에 감동하면서 엉뚱하게도 한반도 현실에 대한 거시적 안목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희년의 영성입니다. 희년의 정신이, 영성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서도 면면히 계승됨을 봅니다.
인간의 해방, 경제적 해방, 생태적 해방, 전분야를 망라한, 기후재난을 겪으며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참으로 구원의 영감을 제공하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50년마다 일어나는 희년의 주요목적은 공동체의 사회적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탐욕에 눈먼 약육강식, 적자생존, 각자도생, 생존경쟁의 자본주의 시대에 참으로 절실한 희년의 영성의 실현입니다.
1.개인적인 해방과 자유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노예는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인간 모두의 해방이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2.경제적 해방과 자유의 차원에서 모든 조상의 땅은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사람은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생계가 가족 토지의 소유권에 의존하는 공동체에서 사회적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3.생태적 해방과 자유의 차원이 참신합니다. 너무 착취되어 고갈되는 자연에 온갖 과다한 쓰레기들로 수난을 겪는 땅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희년에는 씨를 뿌리거나, 난 것을 거두거나, 손질하지 않는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밭에서 직접 가져온 것만 먹을 수 있었고 다른 어떤 소산도 먹을 수 없습니다. 희년동안 밭은 휴경으로 땅도 휴식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레위기에서 소개되는 희년의 내용들입니다. 마지막 구절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늘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이웃에게 정직하라는 말씀이요 하느님을 경외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라는 권고입니다.
참으로 작금의 불평등과 분열의 시대에 공존공생의 지혜를 제시하는 거시적 영적 안목을 주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생태계 모두가 공존공생 더불어 살기위해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땅도 쉬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 중병에 걸린 땅의 착취도 끝내고 살려내야 합니다. 지구의 종말은 인류의 종말입니다.
이런 희년의 영성은 고스란히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전수됩니다. 공생애에 앞서 나자렛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희년을 선포하시는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흡사 출사표出師表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하늘 나라의 비전이 고스란히 담긴 희년의 영성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동시에 오늘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희년의 영성을, 정의와 평화, 해방과 자유, 공존공생의 균형과 조화의 삶을 추구히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런 정의와 평화의 삶을 추구하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통해 악의 실체가 어둠의 세력이 고스란히 폭로되고 있습니다.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 모두가 괴물이자 악마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이탈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불행한 죽음으로 끝나는 듯 하지만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하며 불안으로 전전긍긍합니다. 마치 바톤 텃치처럼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 예수님이요 오늘까지 가톨릭교회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예언자의 전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살아 났고 오늘 우리를 통해 살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새삼 하느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몫까지 살 계획을 새로이 했을 예수님입니다. 희년의 영성을 통한 거시적 영적 안목과 현재 한반도 역사에 대한 거시적 현실적 안목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내부의 극단적 반목과 분열이 얼마나 어리석고 치명적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약하고 작아도 내적분열로 망했지 결코 외적의 침임으로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약하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원인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하니 안에서부터 부패와 분열로 무너지면 속수무책 답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거시적 영적 안목을 지니고 우리 모두 희년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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