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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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8-06 | 조회수52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가해] 마태 17,1-9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막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가장 반가운 일은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입니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며 피로를 풀기도 하지요. 그곳은 먹을 거리도 풍족한 편이기에 뜨겁고 메마른 사막에 비하면 ‘지상 낙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아시스가 아무리 좋아도 그곳에 평생 눌러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 물은 언젠가 말라버릴 것이기에, 적당히 수분을 보충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시금 고된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그 여정이 끝나는 것은 사막을 완전히 통과하여 비옥하고 풍족한 땅에 자리잡은 다음입니다. 그 때까지는 힘들고 괴로워도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의 역할은 비옥한 땅에서 누리게 될 풍족한 삶에 대한 ‘맛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아시스에서 누린 잠시의 기쁨으로 위안을 얻고, 풍족한 땅에서 누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그 힘으로 고된 사막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거룩하게 변모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핵심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 위까지 높게 뻗은 ‘산’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한 장소이지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그 거룩한 현존 안에 깊이 머무르며,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받아들이시기 위함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기도’입니다. 즉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시려고, 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를 힘을 얻으시려고 산에 오르신 겁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셨고, 그 일치의 결과로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이 예수님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기 싫지만 그분과 함께 영광은 누리고 싶었던 제자들에게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자기들의 바람이 실현된 상태처럼 보였을 겁니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을 찾아오는 군중들에게 시달려 초췌해진 모습은 사라지고,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이의 초조함과 근심 걱정에 찌든 무력한 모습은 사라지고 위엄과 당당함을 갖춘 멋진 모습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 참 마음이 든든했겠지요. 그리고 비로소 한시름 놓았을 겁니다.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수난 예고’ 때문에 매일 밤을 걱정과 근심으로 신음했었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겁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오아시스에 눌러앉을 생각이 가득 차 있을 그 때,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구약의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과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내용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지요. 모세와 엘리야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더 나아가 죽음까지 겪으시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나눴을 겁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성경과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하셨겠지요. 그러니 힘과 용기를 내어 이 어렵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무사히 잘 마치시라고, 자신들도 그런 예수님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겠노라고 격려와 응원의 마음을 전했을 겁니다.
베드로가 그런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뭔가 상황이 자신이 기대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던,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슬픈 일은 겪지 않아도 될거라고 기대했는데, 그게 아닌거 같으니 마음이 불안해진 겁니다. 그래서 다급하게 예수님께 외칩니다. ‘스승님, 우리 그냥 여기에 머무릅시다. 그냥 거룩하고 찬란한 이 모습 그대로 삽시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던 ‘하느님 나라’의 삶 아닌가요? 이 자리에 머무를수만 있다면, 이 행복을 지킬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머무르거나 안주할 때가 아닙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니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산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 영광과 환희가 가득했던 그 거룩한 모습을 우리가 언젠가 도달해야 할 희망으로 고이 간직하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다시 삶 속으로,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길에는 고통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면, 힘들고 괴로운 세상살이 속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 속에 주저앉지 않고 이 길을 끝까지 걷도록 이끄시기 위해 거룩하게 변모하신 모습을, 우리가 온전히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누릴 기쁨과 영광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시는 것은 당신께 주어진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괴로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을 끝까지 헤아리고 따르셨기에,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실 수 있었던 겁니다. 빛나는 구름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은 우리를 당신과 함께 누리는 영광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조용히 잘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그저 듣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나의 삶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삶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닮아가면, 하느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고 그분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천국의 삶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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