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7. 중풍 병자의 치유 / 갈릴래아 활동기[2] / 부스러기 복음[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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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08-08 | 조회수27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 중풍 병자의 치유(마태 9,1-8; 마르 2,1-12; 루카 5,17-26) / 공관복음[32] 며칠 뒤 예수님께서는 배로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인 카파르나움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그곳은 그분께서 주로 거주하시는 곳으로 ‘주님 고을’로 불리기도 했다. 그분의 성전 세금까지 그곳에서 내셨으니까(마태 17,24-27 참조).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이렇게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날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평상 같은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그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당시의 일반 가옥은 단층으로 지붕은 편편하였다. 그리고 집 밖의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갈 수 있었다. 지붕 또는 옥상은 나무로 된 들보들을 얹고 나무나 갈대 같은 것을 놓고 흙으로 덮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집 구조가 허술해도 지붕에다 구멍을 내어 들것을 그리로 내려 보내는 것은 좀 지나치다. 사람이 많아 들어갈 수 없다하여도 기물까지 파손하는 것은 지금과 비교하면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그 많은 군중은 그때 무엇을 했을까? 아무튼 따지기 좋아하는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들마저 멍청이 보고만 있었다. 평소 때도 저들은 자비는커녕 사지가 뒤틀린 허약하고 비참한 중풍 병자를 그저 남인 양 외면만 한 그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들것에 실린 중풍 병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얘야’, 자비의 예수님께서는 마치 아들처럼 환자를 부르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쩌면 격한 감정이 솟구치는 말일 수도. 지금 그분께서는 들것에 실린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보신 게 아닌, 그를 여기까지 내려 보낸 이들의 그 강한 믿음을 보셨으리라. 당신을 치유자로 여겨 저렇게 한 마음으로 진지하고도 끈질기게 망가져가는 한 육신을 구원해주려는 저들의 믿음은 과연 어디서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거기에 있는 들을 귀 있는 이들에게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라. 너희를 죄다 치유해 주마. 나는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이다.” 라며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러자 율법 교사와 바리사이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악을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밖으로 걸어 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곳의 모든 이들은 몸조차 가누지 못해 들것에 실려 온 중풍 병자가 자기를 실은 그 들것을 자기가 직접 들고 나가는 신비로운 일을 보았다. 그리고 하느님을 모독하다 혼란에 빠진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 같은 이들도 보았다. 그들이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대든 그 고백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로 내가 그 하느님’ 이라면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를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용서하신 것이다. 그렇다. 중풍 병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치유되었다. 이름 없는 그들의 믿음이 이름 모를 중풍 걸린 병자를 기적처럼 치유토록 했다. 비록 끝내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면 들것을 들고 온 그들, 지붕에다 구멍을 낸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우리 역시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금 여기를 지내고 있다. 우리 역시 저 환자마냥 언젠가는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으리라. 그때 나는 누구의 도움을 받을까? 그때를 위해서 나 역시 지금부터라도 누군가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될 것 같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해피 엔드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계속] [참조] : 이어서 ‘8. 마태오를 부르심(마태 9,9-13; 마르 2,13-17; 루카 5,27-32)’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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