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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원한 삶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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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8-10 조회수497 추천수5 반대(0) 신고

영원한 삶

-주님을 섬기고 나누고 따르는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시편112,1)“

 

오래전 애독했던 ‘니코스 카찬스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읽다가 흥미있는 예화가 있어 나눕니다. 

 

-옛날 후궁에 많은 아내를 거느린 위대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무척 잘 생겼고, 잘 먹고, 잘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도원에 가서 고행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불쌍하다는 듯 고행자를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굉장한 희생을 치르시는군요.”

그가 말하자, 

“당신의 희생이 더 커요.”

고행자는 대답했습니다.

“어째서요?”

“나는 덧없는 삶을 버렸는데, 당신은 영원한 삶을 버렸으니까요.”-

 

-어느 날 젊은 여자가 사막의 안토니오를 찾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지켰고, 정성껏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은 저를 위해 천국문을 열어 주시겠죠?”

이어지는 안토니오와 여자와의 대화입니다.

“당신에게는 가난이 부유함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아바”

“불명예는 명예가 되고요?”

“아닙니다. 아바”

“적들은 친구가 되고요?”

“아닙니다. 아바”

“그렇다면 아가씨, 지금 당신은 아무 것도 갖지 못했으니 어서 가서 정진하세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하는 일화들입니다. 덧없는 삶중에 어떻게 하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어떻게 살아야 덧없는 삶중에도 모두를 지닌 내적 부요의 삶, 영원한 삶을,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을 섬기고 나누고 따라 살면 됩니다. 어제 써놓은 짧은 깨달음의 글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 인생인데

남은 휴가 얼마 안남았는데

날마다 휴가처럼 사는데

새삼 무슨 휴가?”-

 

덧없이 흐르는 세월, 하루하루가 소중한 인생 휴가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가 영원한 삶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 오늘 지금 여기의 꽃자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런 진리를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영원한 삶의 비결을 말씀해 줍니다. 무지의 눈을 활짝 열어 영원한 삶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순교성인과 순교적 삶을 살았던 모든 이들을 그러했습니다. 이미 살아서 끊임없이 사랑으로 버리고 비워 죽어감으로 무수한 열매를 맺기 시작한 삶이 영원한 삶입니다. 죽어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순교적 삶을 사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악귀는 욕망을 먹고 자란다’ 며칠전 신문에서 읽은 대목입니다. 누구나 세상 욕심중에 살면 악귀가 될 수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길은 다음뿐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지고한 가치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정말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목숨에 초연한 사람들로 자기를 비워가는 무욕의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늘 사랑으로 섬기고 따르는 주님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에 항구함이 답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섬기고 나누고 따를 때 끊임없는 자기초월의 비움의 삶, 겸손한 삶, 영원한 삶, 천국의 삶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새삼 우리의 단 하나의 영성은 “섬김servive과 종servant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나눔이 주님을 따름입니다. 섬김과 나눔과 따름중에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요 아버지의 존중과 사랑이 뒤따릅니다. 저절로 나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 고백대로 살 때, 영원한 삶입니다. 자발적 사랑으로 이런 주님을 선택하여 사랑을 훈련하며 살 때 사랑의 습관화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지면서 자발적 나눔의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섬김의 표현이 나눔이요 따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갈 때 하느님의 은총은 차고 넘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스페인 출신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역시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기 까지, 덧없는 삶중에도 영원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성인은 순교직전 교회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눠준후 이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리고 나타나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입니다. 영원한 삶에 활짝 눈이 열렸기에 참보물이 가난한 사람들임을 알아챘던 성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 늘 현존하시는 참보물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성인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시인 프루텐타우스는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며 그를 칭송합니다. 성인의 축일은 4세기부터 교회전례에 도입되고 그에 대한 공경은 널리 빠르게 확산되어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면서 빈민과 요리사, 소방관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모든 성인이 그러하지만 성 라우렌시오 부제 역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따름으로 덧없는 삶중에도 주님과 일치되어 영원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덧없는 삶중에도 온갖 유혹에서 벗어나 초연한,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5-6).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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