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연중 제19주일: 마태오 14, 22 ? 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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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3-08-12 | 조회수46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오늘 독서의 동굴 속의 엘리야와 호수에 빠진 베드로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이 두 상징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풍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소심한 인간의 양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어가는 이야기로, 그 이야기란 다름 아닌 자신이 누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 또한 옆집의 그 사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소시민적인 근성과 그렇고 그런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렬한 자기 깨달음의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엘리야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묵상해 봅시다.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가 활개 치는 세상에서 홀로 하느님의 영으로 불타올라 갈멜산에서 누가 진짜 예언자인지, 누가 참된 하느님의 사자使者인지 판가름하는 진검승부를 펼쳐 승리하지만, 이세벨 왕비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위협에 엘리야는 이세벨이 무서워 호렙산으로 줄행랑을 쳐 도망칩니다. 나름대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정의로운 행동에 목숨까지 걸면서 싸웠던 위대한 존재가, 자신을 위협하는 이세벨의 기세가 무서워 줄행랑을 쳐 도망치는 꼴은 마치 우리 자신의 어두운 구석, 내면의 그림자와 콤플렉스를 보여 줍니다. 남자란 가끔은 이런 허망한 구석이 있답니다. 자기 딴에는 제법 그럴싸한 객기로 강한 척하면서도 남이 이해할 수 없는 하찮은 것으로 말미암아 꼬리를 내려 뒷걸음치는 면이 있고, 이를 심리학에서는 퇴행이라고 하지요. 자기 안의 어둠(=동굴)에 머물고, 자기 열등감이나 콤플렉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지극히 나약한 모습을 엘리야는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남자란 자기 어둠, 문제로부터 스스로 제 발로 동굴이나 방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 열왕기에선,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합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는(19,11) 이 명령은 단지 엘리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자신의 내적 어둠, 동굴에서 처박혀 있지 말고, 자신의 열등감이나 콤플렉스에 연연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더 잘 아시고, 골수와 머리카락까지도 꿰뚫으신 분이시기에 당신 앞에 당당히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고 오히려 미풍 가운데 서 계시는 하느님의 자애 앞에 있는 그대로, ‘지금 너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3,9~10)라는 대답을 대신해서, 그야말로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나와 서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지만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존재인가를 깊이 깨닫고, 사랑과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느님 앞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순수와 거짓, 정의와 불의, 선과 악으로 늘 내적 싸움을 하는 존재로 사랑하게 되며 떳떳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남을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길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자신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불같은 열정 속에 숨겨진 욕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진과 같은 외침 속에 숨겨진 자기 교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바람 같은 부드러움 몸짓 속에 드리워진 콤플렉스의 그림자를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세상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이야기 또한 아주 미묘한 상황입니다. 저녁에 호수를 건너기 시작한 배는 이미 새벽, 여명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풍랑(=내적 갈등)에 허덕이고 겁에 잔뜩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한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14,28)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참으로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은 행동은 어떤 누구도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었던 존재는 없었고 없을 만큼 대단히 신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행한 위대한 일처럼,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위대한 일을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14,30)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비굴하고 나약한 자기 모습을 직면하자 이내 호수에 빠져듭니다. (*엘리야의 동굴로 칩거와 동일 이미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모순적 실존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다만 이런 자신의 콤플렉스나 열등감에 주저앉지 않고 기꺼이 인정하면서 ‘주님 앞에 서라, 오너라.’는 주님의 따뜻한 격려와 지지에 힘입어 극복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이러한 과정은 주님과의 믿음의 여정이며 관계의 심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호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동굴에 스스로 칩거할 수 있고, 상황이나 외적 환경과 현실에 의해 호수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음을 인정합시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놓일 때 자신의 나약함이나 실패나 열등감에 연연하거나 집중하지 않고 ‘여기 지금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14,30)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동굴에서나 호수에서 벗어나고 빠져나올 수 있으며,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나라한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을 관상의 경지라고 하며, 이런 관상의 경지에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영혼을 보시듯이 영혼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내면이 미풍처럼 가라앉고 잠잠할 때 느껴지며,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인간의 허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자신, 이미 내 안에 내 것이 되어 버리신 하느님과 참된 일치와 친교의 관계를 누릴 것입니다. ‘진계유’라는 분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자신의 진면목을 듣고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의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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