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9주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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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8-13 | 조회수46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19주일 가해] 마태 14,22-33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배는 항구에 매여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배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안전하게 매여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위험요소가 가득한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신앙이라는 배를 타고 이 세상의 건너편에 있는 저 세상,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 배는 저절로 알아서 항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센 세파 속에서 침몰하지 않으려면, 키를 제대로 잡고서 모든 위험요소를 헤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는 제자들에게서 그런 우리의 모습이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중간에 역풍(逆風)을 만나 시달리고 있습니다. '역풍을 맞는다'는 것은 일이 뜻하는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뜻하지요. '육지'로 표상되는 세상에서 멀어져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반대편으로 나아가자 '맞바람'(역풍)이 불어 그런 제자들을 방해하고 제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역풍'을 맞으면 우리는 보통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일을 괜히 시작했나?' '괜히 주님의 뜻을 따르다가 망하는게 아닌가?' 동굴 속에 숨어있던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역풍'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신앙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들 곁으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다가가십니다. 똑같은 물 위에서 배를 탄 제자들은 파도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 위를 부드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걸어오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이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세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 세상의 유혹과 방해들을 발 아래 두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기에 자기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하며 호들갑들을 떨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거기서 빠져나가기 위한 '도전'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물 위를 걸어서 두려움에서 벗어나 당신께로 나아가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거센 비람에도 흔들림없이 편안해보이시는 그분의 담대함을 닮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으로 걷는 것이라면 물 위를 걷더라도 별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위를 잘 걷던 베드로가 중간에 거센 바람에 시선을 빼앗기자 자신의 안전이 걱정되었고, 그는 곧 물 속으로 빠져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걷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불안과 공포를 겪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거센 바람을 만나고, 당장 자기를 삼킬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닥쳐도, 그것에 시선을 빼앗겨 절망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걸을 뿐입니다. 즉 신앙인은 예수님과 함께 불안과 공포를 극복해 가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불안과 공포를 없애주는 마술(魔術)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신앙인만을 선별적으로 보호해 주지 않으십니다. 신앙인이 세파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하느님에게 늘 기도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파(世波)에 시달리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 격려하며, 그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그들을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들을 통해 불안을 믿음으로, 공포를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지요.
각각의 나무는 싹이 트고 자라고 사라지지만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살면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세상에 태어난 날이 있으면 언젠가는 세상에서 떠날 날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많은 '보험'을 들어놓고 싶어하고, 세상에서 얻은 것들을 '잃는' 일을 그만큼 두렵고 공포스럽게 느끼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따르는 과정에서 세상에서 얻은 '나무'들을 잃을 수는 있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다 소중하고 귀하며 가치있는 '숲'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절대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 위를 걸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교훈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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