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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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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9-24 조회수346 추천수4 반대(0) 신고

230924. 연중 제25주간.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3) 

오늘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곧 자비의 나라임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곧 자비로우신 분임을 자비를 드러내주며, 동시에 그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자비와 하느님의 자비가 어떻게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를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제2 이사야의 말씀인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자비”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 지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곧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한 데나리온, 곧 그 당시 서민가정의 하루 식비를 약속하고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아침 9시, 12시, 3시, 5시에도 나가서,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보내어 일하게 합니다. 이처럼, 포도원 주인은 도대체가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계산이라고는 아예 모릅니다. 이는 주인이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라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과 자비”입니다. 그 “은총과 자비”는 하느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과 자비”인 것입니다. 오늘도 벌어지는 이 “은총과 자비”에 우리는 기꺼이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로, 주인은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이처럼, 굳이 늦게 온 이들부터 같은 품삯을 주는 이유는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꼴찌”가 먼저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공로에 준해서 베풀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부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코 순서를 따질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비도 그가 나와 친척이나 친분이 있는가를 찾아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전혀 무관할지라도 먼저 필요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셋째>로는 주인은 저녁에 품삯을 주면서, 늦게 온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들까지 같은 일당을 쳐 줍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관념으로 보면,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니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셈해주었을 뿐입니다. 결국, 먼저 온 이든, 나중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자비의 베푸심입니다. 곧 그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자유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의 합리성에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주권적이 자유를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자비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자비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총과 자비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제2독서>인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서 쓴 [필립비서]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필리 1,20)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자비’가 아니라 ‘하느님이 베푸신 자비의 마음’을 지녀냐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하느님 생각과 빗나가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서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타자를 앞세우는 자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곧 타자를 위해 자신이 손해보고 훼손되는 자비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실행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말로는 그리스도인일지언정 실천적으로는 비신앙인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타자를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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