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6.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어야[2/4] / 상경기[3] / 공관복음[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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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0-04 | 조회수27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6.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어야[2/4](루카 10,29-37) / 부스러기 복음[81]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간단하였다. “그래, 맞다. 너도 그대로 하여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논쟁해서 곤경에 빠지게 하려고 작심한 그에게, 그리 긴 설명이 그다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첫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가 이웃 사랑을 하면 된다. 그것도 마음과 생각과 목숨을 다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또, 모든 것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것은 진리 중의 진리이다. 이것은 율법에만 해당되는 게 아닌, 신앙인인 우리네 삶에서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했는데 어찌 그의 이름이 우리의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겠는가! 이러한 성인이야말로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말도 있잖은가. 그러면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 이가 우리네 사회에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예수님 말고 이러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 과연 존재나 했겠는가? 예수님은 경천애인 그 자체를 삶의 기준으로 하고 실천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신지 3일 만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 가사, 우리 일반인들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였다 하면, 비록 육신은 죽어도 그 이름은 두고두고 모든 이의 뇌리에 남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아니 그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발자취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곁에 남아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그래, 맞다. 너도 그대로 하여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불변의 진리를 인간의 각도에서 자기가 옳다고 뽐내는 것은,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는 얼마나 하찮은 것임에랴!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 응수에 율법 학자는 다시 논쟁거리를 만든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는 법률적인 용어 구분에 대한 정의를 해보자는 것처럼, 갈 길 바쁘신 예수님께 하찮은 질문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져 보자면서 덤빈다. 이왕 논쟁은 시작되었고 어차피 결론을 만들어보겠다는 심보 같다. 아마도 그는 자기는 율법 학자인데, 예수라는 이름을 당신은 어부 출신 몇 사람과 어울려 다니면서, 자칭 구세주라 주장하는 볼품없는 사람으로도 생각하였을 수도. 그렇게 그는 이 학벌 없는 작자와 조금 고차원적인 논쟁을 해서 콧대를 꼭 꺾어야겠다는 그 나름의 심산도 있었으리라.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렇다.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답하기가 아주 어려운 타성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금 우리가 아무 부담 없이 던지는 우리 자신의 질문이기도 하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또, 모든 것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려면, 굳이 이 이웃을 선정하여야 한다는 그 자체가 아주 비인간적이다. 이웃은 우리의 주위에 언제나 있다. 이웃이 나의 이웃이고, 나 역시 남의 이웃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라고 우리가 이 이웃을 정할 때, 우리는 항상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려 한다. 그 이웃이라는 대상을 언제나 나의 기준에 두고 정한다. 율법 학자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이웃’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하자면서, 지금 예수님과 감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우월감을 마치 과시라도 하듯이, 자칭 ‘메시아라는 너는 이웃이라는 이 정의를 잘 알고 있느냐?’ 라는 속셈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게 당당히 덤비는 것이다. 아무튼 이 질문의 핵심은 나의 이웃과 나와의 관계이다. 감히 생각하건데, 우리는 통상 나의 이웃 선정 방법에서 이웃 그 자체보다, 나의 관점으로 ‘그 이웃’을 ‘나의 이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의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나의 이웃’이 되는 이상한 ‘방향’으로의 변질이 간혹 발생한다.[계속] [참조] : 이어서 ‘7.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어야[3/4](루카 10,29-37)’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받고 내가 주는’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도 받고 나도 받는’ 외형적이고도 계산적으로만 보여주려는 사랑이 되기도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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