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10. 마르타와 마리아[2/2] / 상경기[3] / 공관복음[85] | |||
---|---|---|---|---|
이전글 | ■ 황소와 수레바퀴 / 따뜻한 하루[215] |1| | |||
다음글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 |3| | |||
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0-11 | 조회수22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0. 마르타와 마리아[2/2](루카 10,38-42) / 부스러기 복음[85] 지금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두 번이나 부르신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예수님께서 사람을 두 번이나 이름을 부르신 것은, 그를 박해한 사울 등이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그분께서 면전에서 이렇게 두 번이나 부르신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믿었고, 사랑의 말씀을 드리려 하는 게 아닐까? 이는 어쩌면 지금 그녀가 당신을 직접 마중 나왔고, 당신 일행을 위해 시중드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고 고맙기 그지없다는 뜻도 담겨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만큼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족하다는 표시일 수도. 그러기에 지금 네가 부탁하는 내 발치서 내 말 열심히 듣는 네 동생 마리아까지 불러내어 시중드는 일까지 돕도록 할 것까지는 없다는 당부일 수도 있으리라. 그처럼 너의 시중 그 정도로도 족하다는 것일 수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바쁜 틈에서도 찾아와 어리광을 부리는 마르타를 다정히 달래고자, 두 번씩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신 것일 게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를 두고서 후대의 성경 여러 주석에서는 더러,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동보다 원의미의 수도 생활 곧 관상(觀想)이 더 우월하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선포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거의 동등한 교육 기회를 주셨다는 좋은 예로 내세우기도 한다. 사실 지금 마르타의 시중드는 ‘봉사’도, 마리아의 예수님 발치에서의 들음인 ‘경청’도 어느 하나 덜 중요함이 없다하겠다. 가톨릭에서는 유독 더 그렇다. 믿음 그 자체 못지않게 그 실천마저도 상당히 중요하니까? ‘오직 믿음’만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그 믿음의 실천역시 중요함은 신앙생활에서는 당연히 필수이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친구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를 지금 다정스레 달래시고 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달래시면서, 마리아 역시 ‘좋은 몫’을 선택했음을 부연하신다. 마리아의 이 들음은 지금은 무엇보다 경청의 때라는 것이다. 이는 곧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당신의 때가 가까워 졌다는 암시하는 것일 게다. 그렇다고 마르타의 시중보다 더 높은 단계로 두지는 않으신 것 같다. 그것은 마르타를 두 번이나 부르신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그 좋은 몫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란다. 어쩌면 이는 마르타의 몫은 언젠가 빼앗길 수 있음을 암시하셨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 받는 이가 곁에 있을 동안만 가능하리라는 의미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라자로와 함께 할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그렇다. 어쩌면 마르타의 봉사는 때가오면 후임에게 넘겨 그만둘 수가 있지만, 하느님의 믿음의 사랑은 영속될 것이다. 이 하느님 사랑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자동 연결된다. 이는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이 없고,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이 없기에. 그러기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앞에다 두시고 마르타를 두 번씩이나 부르셨다. 이는 들음도 시중도 다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계속] [참조] : 이어서 ‘11. 주님의 기도(마태 6,9-13; 루카 11,2-4)’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이 기도문은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