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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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10-18 | 조회수546 | 추천수5 | 반대(0) |
미주 지역은 사는 곳이 넓고, 시차도 있기에 한곳에 모여서 강의를 듣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면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 기획팀’을 발족하였고,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면서 강좌를 기획하고 준비하였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좋은 강의를 준비해 주시는 강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에 함께 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열정과 헌신으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기획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9월에는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 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구체적인 사료와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 작성한 ‘사학징의(邪學懲義)와 형추문목(刑推問目)’에는 천주교인들의 현황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초대 한국 천주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압수한 물품에는 다양한 성물과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은 한문과 한글로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책은 한글로 번역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책을 통해서 교리를 배웠고, 신앙생활의 규범을 배웠습니다. 교우들은 성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미 순교한 신앙인들의 머리카락과 그들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였으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따를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여성과 양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명도회는 오늘날 사목회와 비슷한 조직인데 명도회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는 천주의 영광을 밝게 드러냄(明顯天主光榮), 둘째는 성모의 공덕을 찬송함(頌揚聖母功德), 셋째는 어리석은 이를 가르침(訓誨愚蒙), 넷째는 냉담자를 일깨움(提醒冷淡), 다섯째는 곧 죽을 어린이에게 대세를 줌(洗將死之孩), 여섯째는 임종의 어려움을 도와줌(助臨終之險), 일곱째는 이단의 주장을 물리침(闢除異說), 여덟째는 미혹한 길을 열어 인도함(開導迷途)이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조선교회가 100년간의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10,000명이 넘는 순교자가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옮겨감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깊은 산골의 교우촌에서도, 감옥에서도, 죽음을 앞둔 형장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주교님께 보낸 편지에서 교우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2박3일을 걸어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마치면 다시 2박3일을 걸어갑니다. 고백성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우들의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박해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회를 성찰해 봅니다.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일미사 참례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80%가 넘는 교우들이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각 본당마다 예비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불 때도 선교했는데 선교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사제성소가 줄고 있습니다. 박해의 시간에도 신학생을 선발하였고, 멀리 마카오까지 보냈던 교회입니다. 환영의 꽃다발이 아닌 포도청의 몽둥이가 기다릴지라도 굳센 믿음으로 사제가 되었던 교회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교회의 활력이 약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욕심, 원망, 불평, 교만’한 사람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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