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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려워하지 마라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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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3-10-20 조회수408 추천수5 반대(0) 신고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오늘 새벽 밤하늘도 북두칠성이 뚜렷이 빛나니 기분이 좋습니다. 제 성소는 간절함입니다. 이 간절함이 날마다 강론을 쓰게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바로 이 말마디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하나가 더 붙는다면 완벽한 하느님의 정의가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중 다음 말씀은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 믿는 모든 이를 주님은 벗이라 합니다. 공관복음을 통틀어 여기서만 제자들을 벗이라 말합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벗이란 말마디가 너무 고맙습니다. 그러니 벗인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벗인 주님과 우정의 여정중 우정이 날로 깊어지면서 두려움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말마디인지요! 여기 요셉 수도원의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 성심상은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예수 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나다”, 바로 주님인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추호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23장 1절,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첫 구절입니다. 일부 말마디를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그러니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목자이자 벗이기도 하니 이런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도 은혜로이 기억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포위되어 사는 지요.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 인간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두려워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증폭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무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가 365회 나옵니다. 

 

주님은 일년내내 하루하루 날마다 우리를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십니다. 제가 고백상담시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 여섯째 숙부께서 임종전 1주일 동안 꼭 붙잡고 지냈던 성구이기도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시편41,10)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언젠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사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도 옛 성현(聖賢)들처럼 늘 신독(愼獨)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감”이란 신독(愼獨)의 뜻이 참 좋습니다. 이어 거침없이 쏟아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두려워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최악의 적이 아니라 조만간 맞이할 자연스런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옥에 던지시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시키기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옥은 하느님 탓이 아닌 스스로 선택함으로 자초한 재앙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사람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건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敬畏)의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괴물같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말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하느님을 경외할 때, 두려워할 때 비로소 주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 성심상 배경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산, 불암산이 흡사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하느님을 연상케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주님의 육성을 듣는 듯 합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몰라서 우연이지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에게 많이 선물했던 책중 하나가 “눈속에서의 삼개월”인데 거기 나오는, “나뭇잎 하나도 하느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한구절이 지금도 생각나는 데 오늘 복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눈속에서의 삼개월”과 더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참 많이 아이들 생일때 선물했던 책입니다.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신망애(信望愛)의 하느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두려워하느냐?” 질책후 예외없이 이어지는 말씀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수록 무지의 어둠도, 무지에 의한 두려움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의 찬사를 받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의로움으로 인정받는 믿음을 지닐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해방입니다. 하느님께서 행위와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다윗은 시편(32,1-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들!”

 

아브라함처럼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이런 의로움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도록 도와 주시어 우리 모두 의로운 삶, 두려움 없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이 즉 신망애(信望愛) 하느님을 경외함이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시편51,14).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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