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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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10-26 | 조회수619 | 추천수8 | 반대(0) |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의 날개만으로는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는 서로 대립하거나 싸우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 주는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는 여당과 야당이 있습니다. 여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 일정기간 국가를 운영하는 정당입니다. 야당은 국민의 선택은 받지 못했지만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이 국가를 위한 것인지 살펴보고, 다음에는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정당입니다. 여당과 야당은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한, 국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야 합니다. 국민은 보지 않고 상대방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정당만 있다면 그런 국가는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3류 국가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1류 국가를 만들어 복지와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3류 국가를 만들어 독재와 폭력으로 가난과 공포가 만연하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냉철한 판단과 불의에 맞서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는 시민들의 용기만이 문화와 복지가 넘쳐나는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땀과 열정, 때로는 피와 눈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라보는 성찰입니다. 깊은 성찰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와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낳습니다. 회개와 결심이 없는 성찰은 울리는 징과 같이 공허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있지 못하는 불충한 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때리고, 주인이 보낸 외아들까지 죽여 버리는 나쁜 소작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곳간에만 재물을 채우고 좋아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자만 좋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었던 부자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면서 남들도 들어가기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하고 회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가진 것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성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에는 늘 ‘패자부활전’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입니다. 성찰이 나의 삶에 대한 것이라면 식별은 그런 성찰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입니다. 고독과 위안이 식별의 기준은 아닙니다.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우리는 악으로부터도 고독과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적인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욕망과 욕심에서 위안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방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채워지는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를 육적인 고독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육적인 위로를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던 부자입니다. 자신의 곳간에 재물을 쌓아놓고 좋아했던 부자입니다. 명예와 권력, 재물에 취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적인 위로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독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영적인 고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산상수훈’은 영적인 위로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런 예수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불은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불은 영적인 위로와 고독을 식별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참된 신앙은 성찰과 식별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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