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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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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0-30 조회수307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루카 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그마치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진 채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런 증상을 현대 의학에서는 ‘척추 교착염’이라고 부른답니다. 그 병에 걸리면 사지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고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고 하지요. 보통 40세 이후에 발병되는데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그 병을 앓았다고 하니 아마 그녀는 거의 환갑이 다 된, 그 때 기준으로는 ‘할머니’였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데도 그분께 자비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살만큼 살았고 이제와서 뭐가 달라질 것도 없으니, 희망을 버리고 자포자기 상태로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녀를 당신 가까이 부르시고,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아픈 부위에 손을 얹어 주십니다.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질병의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졌고, 이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런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그런 놀라운 일은 하느님이 아니면, 그분께서 능력을 맡기고 파견하신 이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그런 것인데, 그 찬양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고귀한 사명을 부여받고 파견되신 특별한 존재임을 드러낸 셈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치유해주신 그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던 겁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회당장은 바로 그 점을 문제 삼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질병을 치유해주신 사건을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인 ‘노동’으로 간주하여,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고 나선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신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을 직접 반대하지는 못하고, 사람들이 그분 곁으로 몰려들어 치료 받지 못하게 하려고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 다시 오라’며 군중들을 해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탈출기 20,8-11에 따르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그저 일을 멈추는데에 있는게 아니라, 불의와 악행을 멈추고 사회적 약자들을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율법 규정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던 회당장이 그 점을 몰랐을 리 없지요. 그럼에도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된다’고 부르짖은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켜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모습이 꼴보기 싫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기의 시커먼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율법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투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위선’을 비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집에서 키우는 짐승은 그렇게나 잘 챙기면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어찌 그리 인색하게 구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가축들을 아끼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축이 죽으면 자기에게 큰 손실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랬을 뿐입니다. 애초부터 그들의 마음에 사랑은 없었던 겁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대합니다. 하나는  ‘이익과 손해’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옳고 그름’의 관점이지요. 회당장이나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동물은 ‘손익’의 관점으로, 자기들에게 이익이 안되는 다른 사람은 ‘옳고 그름’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기준이 없기에 ‘악마의 속삭임’에 이리저리 휘둘린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이라는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 안에서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며 기쁘고 자유롭게,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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