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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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11-03 | 조회수262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루카 14,1-6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어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식사 자리에 ‘수종’이라는 병을 앓고 있던 이도 함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수종병’(水腫病)은 액체 성분이 신체의 특정 부위에 가득 차 몸이 붓는 질환입니다. 그러면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시면 목이 더욱 마르고 몸이 붓는 증세도 더 심해진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고 대처하면 치료가 가능한 병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일단 그 병에 걸리면 마땅한 치료제도 없이, 회복되리라는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병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 치유의 은총을 입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뭔가 부자연스럽다는걸 깨닫게 됩니다. 병에 걸린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부정한’ 이라고 여기는게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게다가 바리사이들은 부정한 이들과 접촉하여 자기들까지 부정해지는걸 극도로 꺼리는 이들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이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 수종병자가 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지도자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치유해주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자기들이 그 현장을 적발하여 예수님을 옭아맬 구실을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그를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 말씀을 들은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인정하면 ‘안식일에는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의 전통을 정면으로 거스르게 될 것이고, 합당하지 않다고 거부하면 자기들이 고통을 겪는 이웃에게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비정한 인간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지요. 그들의 비열한 태도를 보고 예수님은 ‘참 답이 없다’고 생각하셨을듯 합니다. 실망과 안타까움, 노여움이 뒤섞인 비통한 심정으로 입을 꾹 다무신 채 그 수종병자의 손을 잡아 병을 치유해주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들의 비겁한 침묵에 슬픔과 정의의 침묵으로 응답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으시지요.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또 침묵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소중히 여기는 재산에만 신경쓸 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질병으로 고통 받건말건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여기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소중한 한 사람이 지금 즉시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도와 형식을 지키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테구요.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옭아매려던 그 율법에 스스로가 걸려 넘어진 꼴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그 율법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 참된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시 일어서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의 허울에서 벗어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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