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5. 연중 제31주일.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9)
가을은 신비의 계절입니다. 가을은 우리를 깊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낙엽은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스승이 됩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낙옆”이란 스승에게서 이렇게 배움을 시로 노래합니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스승이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P.이제민)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내게 스승이 없다면, 내가 머리를 굽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 중에 한 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어찌 스승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이지 않을까요. 겉으로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막상은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스승” 혹은 “참된 제자”에 대해 묻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사제들이 길에서 벗어나 오히려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한 것에 대해 질책합니다.
반대로, <제2독서>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바오로 사도의 모습과 그 가르침을 받고 받아들이는 제자로서의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스승으로 불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3-4)
이처럼, 그들의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에게 짐만 지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태 23,5 참조). 곧 표리부동할뿐 아니라 위선으로 속였습니다. 그들은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였습니다.’(마태 23,5 참조). <민수기>(15,38-39)와 <신명기>(22,12)에 따르면, 그것을 착용하는 이들이 하느님께 속했다는 표시로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의미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거룩함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마태 23,6 참조). 곧 자만과 허영에 차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 23,2). 마치, 스승의 자리에 앉은 양 처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9)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한편, 제자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이는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수도에서 물을 마시면서 수도관이 대나무로 만든 관인지 금으로 만든 관인지가 아니라, 그 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 물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또 복음을 듣는 이로서만이 아니라 선포하는 이인지를, 그리고 실천하는 이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
그러니 그저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려가 상대를 높여 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떨어져 땅에 뒹구는 이 가을의 낙엽처럼 돌아가 썩어 거름이 될 자리로 가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 나는 그대에게 /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 그대여 / 가을 저녁 한 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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