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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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11-22 | 조회수22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 루카 19,11ㄴ-28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오늘 복음은 ‘미나’의 비유입니다. 미나는 은으로 만든 화폐로서 약 1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천 만원 정도에 해당합니다. 보통의 봉급생활자가 석달 넘는 기간 동안 일해야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이니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요. ‘미나’의 비유는 주인이 자기 종에게 돈을 맡긴 다음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정산한다는 기본 구조에서는 마태오 복음에 등장하는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내용들에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탈렌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받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섯, 둘, 한 탈렌트로 차등지급하는 것에 비해, 미나의 비유에서는 모든 종에게 동일하게 ‘한 미나’씩 맡깁니다. 이를 통해 미나가 갖는 의미가 탈렌트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지요. 탈렌트가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질 수 있는 능력, 재능, 재물 같은 외적 요건들을 가리킨다면, 미나는 사람마다 동일하게 주어지는 생명, 구원 같은 내적이고 본질적인 조건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열 명의 종에게 똑같이 한 미나씩 지급되었기에 그 미나를 가지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벌이를 하지 않고 그것을 수건에 싸서 묵혀둔 마지막 종은 그런 자기 행동을 합리화 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줄어듭니다. 적어도 ‘남들보다 덜 받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댈 수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 종은 주인 탓을 합니다. 주인이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결과물을 내놓기만을 강요하는 ‘냉혹하신 분’이어서 혹시 주인에게 피해를 끼치기라도 하면 큰 벌을 받게될까 두려웠다는 겁니다. 주인의 뜻과 마음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으니 주인이 한 미나를 분명히 주었음에도 자신은 못받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주인에게 자기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요. 그런 잘못된 생각이 주인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속여 스스로를 두려움과 불행으로 심판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셋째, 미나의 비유에는 주인으로부터 정말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이들이 등장합니다. 주인이 안줘서 못받은게 아니라 자기들이 안받은 겁니다. 주인의 통치권 아래 살면서도 그를 자기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놓고 반기까지 드는 그들이었으니, 주인에게 무엇을 받아도 탐탁지 않게 여겼겠지요. 자기들이 주인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것들에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주인의 주권을 부정하려 드는 그들에게 다가올 미래는 오직 멸망 뿐입니다.
한편, 탈렌트의 비유와 갖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주인이 무엇을 얼만큼 주는지 따지지 않고 자기들이 받은 것에 감사하며 주인의 선한 의도를 따르고자 노력했던 성실한 종들은 큰 보상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그 보상은 단지 재물을 더 얹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주인과 함께 ‘다스리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사는 동안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따르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시간들이 그들을 변화시켜 마침내 주인과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기에,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그분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신앙생활의 참된 목적입니다. 우리는 돈 몇 푼 더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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