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희망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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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11-25 | 조회수23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23,1)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비명으로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시편 성구입니다.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의 착한 목자이자 벗인 살아 계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관계일 것입니다. 11월 위령성월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저는 위령성월을 희망성월, 성인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성부 하느님을 향해 성자 예수님과 함께 성령의 사랑안에서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향하는 성부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중 날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제 좋아하는 위령미사 경문중 한 대목과 위령감사송에 나오는 한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의 삶으로 직결되는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담게 하소서. 또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시작임을 알립니다. 참 요즘 주변에서 가을 단풍잎 지듯이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도 아주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 또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끊임없이 충고하는 현자들입니다. 이어지는 위령 감사송의 다음 대목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며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 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이 또한 거룩한 교회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이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가 된 이들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생 함부로, 생각없이, 욕망대로 막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내 삶의 여정,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구체적 점검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을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은 완전히 실패인생을 살았음을 봅니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뉘우치며 후회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는 자기 벗들을 불러놓고 고백합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 받는 사람이었는데....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참 허망한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문득 조선시대 서른 여덟 짧은 삶이었지만 ‘따뜻한 이상’과 ‘뜨거운 실천’의 힘으로 조선의 정신을 실천하다 억울하게 사사된 중종임금때 충신 조광조의 마지막 감동적인 유언시가 생각납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나라 근심하기를 내집처럼 하였노라. 밝은해 이땅을 굽어보고 있으니, 훤하게 이 충심 비추어 주리라.”
선조실록이 전하는 당대의 대학자 이황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 참 적절하고 아름답습니다.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하여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삶과 죽음에 대한 일화라 인용했습니다. 또 하나 어른이 사라진 이 시대에 참으로 그리운 분, “김수환 추기경 영전에” ‘방문객’의 시인 정현종이 바친 추모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너무 늦게 말씀드리지요만, 우리가 모자라 어려움이 그칠 날이 없었던 그동안, 중대한 사안에 대하여 시의적절 말씀하시는 걸 우리가 얼마나 반겼으며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나라 위한 진정에 눈물겹고 그 생각의 균형과 그 내용의 적절함에 우리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당신은 혹시 알고 계셨는지요. 실은 당신의 얼굴이 참 마음에 든다고 저는 늘 말해왔습니다. 그 얼굴, 그 표정은 천품(天稟)의 선의와 천품의 진정과 천품의 겸손의 육화였습니다. 말씀의 힘이 나오는 그 청정심(淸淨心), 그 마음, 그 말씀, 그 얼굴의 움직이는 표정이 없으니 나라가 텅 비었습니다. 궁핍감이 커집니다. 사람의 궁핍, 천진의 궁핍, 평화의 궁핍....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의 빛, 그 진귀한 아름다움을 추모하는 저희의 아쉬움과 슬픔 속에, 그리하여 그리움 속에 내내 꽃피소서.-
맑고 향기로운 삶이었기에 길이 맑고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는 추기경님입니다. 희망없이, 생각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겠는지요! 그러니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희망의 여정과 함께 가는 기쁨이요, 귀가의 여정과 함께 가는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참기쁨, 주님을 뵈올 참행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부활의 삶이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일곱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두었을 때 사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라는 참 난해한, 말이 안되는 질문으로 주님을 시험했을 때 주님의 통쾌하고 명쾌한 답변이 죽음에 대한 궁극의 답이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삶과 죽음을 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생명의 부활의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하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세오경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천상영혼들, 연옥영혼들, 지상영혼들인 우리 모두가 살아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봉헌되는 연미사와 생미사입니다. 새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만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이자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벗’이 되어 하느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목자이자 벗인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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