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의 묵상 (사제 정천 사도 요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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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12-25 | 조회수14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3년 12월 25일 월요일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의 묵상 (사제 정천 사도 요한)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구원자’이시고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분께서 탄생하셨다는 천사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날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위의 호칭들보다 심오한 예수님의 정체를 계시하며, 성자 강생의 신비를 한층 더 깊이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여기서 말하는 ‘한 처음’은 세상이 창조되던 ‘한 처음’(창세 1,1)을 훨씬 앞서는 시기, 곧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범주를 뛰어넘는 ‘한 처음’입니다. 말씀이신 분께서는 그러한 ‘한 처음’의 순간에 생겨나신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분으로 드러납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늘 함께 계셨으며, 그분도 하느님이셨습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우신 외 아드님이신 성자 하느님이셨습니다. 성부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시어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생명을 지니신 분으로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셨습니다. 곧 말씀은 당신을 통하여 창조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모든 은총의 원천이셨던 것입니다. 말씀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빛으로 정의되시는 분께서 오늘 이 세상에 몸소 내려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당신의 본모습대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곧 인간의 육을 취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사람이 되신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리하셨습니다. 구유에 누워 곤히 잠든 이 아기는 이처럼 놀라운 신비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초라한 마구간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 영광이지만, 우리의 영적인 눈은 이미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예수 성탄 대축일 복음(요한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14ㄱㄴ)
요한 복음 1장 14절부터 18절까지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강생(육화)의 신비를 통한 그리스도의 하느님 되심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교리 가운데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은 요한 복음 1장 1절과 연결되어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본질인 영원한 신성(神性)이 내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요한 복음사가가 이처럼 강생(육화; incarnation)의 진리를 요한 복음 도입부에서부터 강조적으로 진술하는 방법을 택한 것은 당시의 영지주의적 (Gnostic) 경향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희랍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육신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 사이에서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 큰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는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행동하셨을 뿐 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의 현인들 중에는 초월적인 신을 현상 세계 가운데 포함시킨다는 것은 신성모독일 뿐 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주장은 아직 확립된 교리를 갖지 못했던 초대 교회에 큰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직설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본문과 같은 명제 형식을 통해 펼쳐나가고 있다.
한편 '사람'으로 번역된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을 뜻하지만, '몸',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인간성'(human nature), '혈통',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등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사륵스'(sark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빠샤르'(bashar)인데, 70인역(LXX)에서는 '빠샤르'의 절반 이상을 '사륵스'로 번역했다.
'빠샤르'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륵스'와 마찬가지로 살'(flesh), 즉 짐승의 근육 조직을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사람의 몸이라든지 혈연 관계, 생명 그 자체등을 나타내는 데 폭넓게 쓰였고, 신적(神的)인 생명과 대조되는 '창조된 생명'(Created life)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두 개의 단어들 속에 내포된 의미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인간이 되셨음과 그분에게도 육체적 제한성이 따랐음을 확인하게 된다. 피로를 느끼신 것(마르4,38), 시장함을 느끼신 것(마태21,18) 등은 그분에게도 우리와 같은 육체적 제한성이 따랐음을 보여 준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와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사실을 통해(요한11,35) 그분도 우리와 똑같이 연민과 사랑,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죄에 약하고 악에 기울여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와 본성을 입고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우리 인간과 구별되는 분명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그분에게는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고(히브4,15), 둘째는 그분께서는 모든 일에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다는 점이다(요한13,15).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속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과 동시에 그분을 통하여 새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
원문은 '에스케노센 엔 헤민'(eskenosen en hemin; dwelt among us)인데, 직역하면 '그는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가 된다.
'사셨다'로 번역된 '에스케노센'(eskenosen)은 '천막을 세우다' 혹은 '천막에 살다'를 뜻하는 '스케노오'(skenoo)의 부정 과거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서 부정 과거형을 사용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로고스가 육체를 취하여 사시는 것은 일회적이며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양, 즉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머무신 기간은 짧았다. 시간적으로 보면 불과 33년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늘상 함께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보았다'로 번역된 '에테아사메타'(etheasametha ; we have seen; we behold)의 원형 '테아오마이'(theaomai)는 언제나 실제적인 육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이 단어는 영이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영적인 통찰에는 쓰이지 않는다.
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가 현실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서 세상에 오셨으므로, 육안으로 볼 수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바로 인간 예수님 안에 내재된 신적(神的) 영광이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게 하여 보내신 것은 우매하고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직접 눈으로 보고 믿게 하려는 사랑의 배려였다.
요한 복음 사가는 여기서 직접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눈으로 목격했다는 확고하고도 영속적인 증거를 하고 있으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영광과 위엄이 예수님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이 영광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분의 발 아래 승복하지 않는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요 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광'으로 번역된 '독사'(doxa; the glory)란 무엇인가? 이 단어는 '영광'이라는 말 이외에도 '광휘', '광채', '위엄' 등 여러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보드'(kabod)이다. 이것은 물건의 큰 무게나 엄청난 양을 언급하고, 종종 부와 재물, 중요하고 긍적적인 명성 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사용될 때에는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스러운 속성을 나타낸다. 즉 히브리어 '카보드'(kabod)는 희랍어 '독사'(doxa)와 함께 하느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한편 하느님의 영광의 가시적 현상과 관련되어 유대인들이 귀중하게 쓰는 단어로는 '셰키나'(shekinah)가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칸'(shakan)에서 유래하여 '머물러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때를 여러 번 볼 수 있다. 광야에서 굶주림으로 원망하는 이스라엘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약속하실 때(탈출16,10).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체결하러 갔을 때(탈출24,16), 모세가 만남의 천막을 세우는 일을 마쳤을 때에도 주님의 영광이 거기에 충만히 내렸으며(탈출40,34),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에도 그러했다(1열왕8,11).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이란 말이 바로 그분의 현존과 임재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했던 것이다(요한10,30; 14,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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